아름다운 인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버팀목
김붕준·노영재 부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버팀목
김붕준·노영재 부부
김붕준 선생은 수많은 독립운동에 가담하였지만 6·25전쟁 중 납북되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부인 노영재는 1921년 상하이로 망명한 뒤 25년간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임시정부 요인들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등 독립운동 뒷바라지에 힘썼다. 김붕준과 노영재 부부의 집안은 장남 김덕목, 큰딸 김효숙과 사위 송면수, 둘째 딸 김정숙과 사위 고시복 등 7명이 독립운동에 헌신한 가문이다.
100년 전 기억을 되살리다
지난 2019년은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돌을 맞은 해이다. 이를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전시회와 학술회의 개최는 한류열풍과 더불어 한민족의 저력을 지구촌에 널리 알리는 계기였다. 필자에게 주목을 끈 특별전시회는 단연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개최한 〈대한 독립 그날이 오면〉이다.
2부 전시실에는 임시정부 유지에 온몸을 던진 김붕준·노영재 부부의 단아한 유품이 있었다. 힘든 생활 속에서 사용한 트렁크 2점과 태극기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마찬가지로 고단한 인생 역정은 트렁크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손때를 물씬 풍기는 트렁크 옆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중국에서 입었던 중국 복식과 양복을 재현하여 생동감을 더하였다. 임시의정원에서 사용한 태극기도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이들 부부는 바느질로 정성을 기울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부부가 한 땀 한 땀 독립의 그날을 꿈꾼 흔적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멀고도 머나먼 당시의 역사가 다가왔다.

김붕준 어록비(독립기념관 경내)
시대적인 소명의식을 자각하다
김붕준은 1888년 9월 27일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구룡리 용동에서 태어났다. 부친 김의현(金義鉉)과 모친 김씨 사이에 3남 2녀 중 셋째였다. 본관은 의성, 자는 군석(君錫), 호는 당헌(棠軒), 이명은 김기원(金起元)이다. 1904년을 전후로 의성 김씨 집성촌인 용동에 기독교는 1904년 전래되었다. 예수 재림교회 제7안식교회가 한국에 최초 세워진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가족들의 안식교 입교는 김붕준의 의식 세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14세까지 한학을 공부하며 친구들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냥 등으로 소일하는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보냈다. 전통교육은 훗날 여유만만한 대인관계로 자신을 지탱하는 에너지원이었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 침략으로 사회적인 불안은 확산되었다. 시세 변화에 부응하려는 의지는 1908년 보성중학교 농림과 입학으로 이어졌다. 재학 중에는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민족운동 대열에 과감히 뛰어들었다.
1911년에는 승동교회에서 목사 한석진 등과 승동학교 운영에 참여하면서 무사히 학업을 끝마쳤다. 졸업 후 대동강 지류인 동창천 하류 대안 갈대밭 개간과 동시에 수로를 개설하는 등 농업 기반 조성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이상촌건설운동 일환이었다. 신민회는 국권수호운동으로 민족자본 육성과 아울러 모범적인 농촌 개발에 착수하였다. 강제병탄을 전후로 이상촌 건설운동은 해외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지사들과 신민회원들은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들은 서간도 유허현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반면 김붕준은 국내에 남아 자신의 전공을 살려 간척과 농지 개간사업에 매진하였다. 이처럼 시대적인 소명의식을 인식한 의협심이 강한 청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대동단결로 한인사회 버팀목이 되다
일제의 무단통치는 3·1운동으로 폭발되었다. 김붕준은 일제의 야만적인 만행을 폭로하는 데 앞장섰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임시정부 군무부원과 임시의정원 의원과 비서장을 맡았다. 1921년 안창호와 함께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창설하는 등 국외 독립운동 세력과 정보 교류에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1928년 상하이 대한인교민회 제5대 단장을 맡는 등 한인사회 대동단결에 힘썼다. 1930년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경영을 맡아 『독립운동사』 편찬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한인 자제들의 독립의식과 항일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훈화는 학생들에게 조국 광복에 대한 열망을 증폭시키는 자극제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약하면서 1938년 흥사단 원동위원장을 거쳐 이듬해 임시정부 제15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냈다. 김붕준은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물이었다. 1940년에는 한국독립단 위원, 1943년부터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아 1945년 11월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집행 위원들
노영재의 후원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밑거름되다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하여 은밀히 선전원과 특파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부족한 독립자금을 모금하였다. 김붕준 가족은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다가 특파원이 일경에 체포됨으로 절박한 순간을 맞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지혜를 발휘하여 난관을 모면해 나갔다.
당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로 보냈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장 김마리아는 고문으로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 임시정부는 김마리아를 상하이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때 도인권과 김붕준 가족은 그녀 탈출에 함께하였다. 힘든 과정에도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일행은 인천을 출발하여 무사히 상하이 황푸강 부두에 상륙할 수 있었다.
가족은 프랑스조계 보강리에 살고 있었다. 이곳은 대한교육회 본부 사무소로 흥사단원인 박석홍이 동신공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삼과 해산물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부인 노영재는 바느질 솜씨가 탁월하여 넥타이 등 다양한 제품을 만들어 황푸탄 선착장에서 판매하여 생활비에 보탰다. 이윤 중 일부는 임시정부 요인들 식사 대접에 사용할 만큼 가정살이를 도맡았다. 곤궁할 때에는 야채시장에 직접 가서 배추 시래기를 주어와 반찬을 만들어 먹었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려웠으나 부인의 살림살이는 독립운동에 매진할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었다.

김붕준
임시정부 유지에 혼신의 힘을 다하다
국민적인 여망에 순항하던 임시정부는 국제정세 변화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외교론에 치중된 활동은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더욱이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내분은 너무나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였다. 이를 수습하려고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마저 뚜렷한 대안도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하나의 독립운동 단체에 지나지 않는 사실상 ‘식물정부’였다. 김붕준을 비롯하여 흥사단 원동임시위원부원들은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회와 같은 5개 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 연합회를 결성한 이후 다음 단계인 주비회 조직에 앞장섰다. 부단한 노력에도 1929년 유일독립당 상하이지부 해산을 시작으로 관내 유일독립당운동은 유야무야되었다. 그럼에도 한국독립당의 통일전선운동은 임시정부 유지를 위한 활동으로 이어졌다.
한편 1930년 7월에는 임시의정원 내에 상임위원회 조직이 처음으로 출범하였다. 상임위원회는 임시정부 세입·세출의 결산서를 검토하는 회계 검사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윤봉길 의거가 일어난 날에 안창호는 프랑스조계 경관에 곧바로 체포되었다. 일제 영사관경찰은 임시정부 청사, 교민단사, 임시정부 요인들 집을 급습·수색하였다. 아들 김덕목도 체포되어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는 등 아픔을 맛보았다.
1932년 11월에는 광저우에 한국독립당 광둥지부장으로 한인 청년들에게 유학을 알선하였다. 특히 황푸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입학 주선, 학비면제, 생활비 보조 등 편의를 제공하였다. 아들·딸은 물론 후일 큰 사위가 된 송면수 등은 중산대학에 입학하였다. 더불어 중국 남부지역 독립운동 거점 강화와 중국인들과 통일전선 구축을 자임하고 나섰다.임시정부가 1940년 충칭으로 이전하자, 김붕준은 최우선 과제로 독립운동계 통합임을 인식·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당원들을 이끌고 한국독립당통일동지회를 결성하고 조선민족혁명당 개편을 전제로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합병하였다. 조선의용대 본부와 화중·강남지구 잔류 병력도 중국 군사위원회 요구와 임시의정원 결의로 한국광복군 지대로 개편하면서 통합되었다.
한편 1934년 중국 한광사에서 최초 전기인『윤봉길전』이 중국어로 출간되었다. 김붕준은 김기원이라는 이름으로 서문을 썼다. 서문에서 “윤봉길 의거는 한국이 나라를 되찾고 중국이 망국에서 구해지고 동양평화를 이루는 길”이었음을 공언하였다. 그는 한중 국제적인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상하이 인성학교 학생과 교직원
온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서다
부인 노영재는 25년간을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임시정부 요인들과 독립투사들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는 등 뒷바라지에 힘썼다. 와중에도 한국혁명여성동맹의 결성과 민족혁명당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아들 김덕목은 일찍이 상하이로 건너가 흥사단에 가입하여 한중 우호 증진과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중산대학에 재학하다가 중앙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중국군에 배속되어 항일전에도 참전하였다. 중국군 상위로 일본군 정보 수집에 전념하는 한편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로서 활동하였다.
장녀인 김효숙은 1919년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상하이 인성학교를 거쳐 난징 중산대학을 졸업하였다. 동생 김정숙 등과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여 선전공작에 앞장섰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가입하여 대일선무공작과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는 한편 한인 아동교육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혁명여성동맹 부회장과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피선되었다. 큰사위 송면수는 중산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국경의 밤〉, 〈상병의 벗〉, 〈전야〉 등 항일연극을 공연하는 등 문화선전 활동을 주도하였다. 이는 한중 인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일환이었다. 특히 이범석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정훈조장으로 미국정보처(OSS)에서 교육훈련을 받았다. 국내정진군 황해도 반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진공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김정숙은 김붕준 막내딸로 중산대학 재학 중 학생전시복무단을 조직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앞장섰다.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후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하여 상임위원 겸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에 입대하여 대적심리공작을 담당하는 한편 이후 임시정부 교통부 비서, 의정원 비서, 법무부 비서 겸 총무과장 등을 맡았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작전처 심리작전연구실 보좌관으로 전단 작성, 전략 방송, 원고 작성 등을 수행하였다. 1945년 11월까지 임시정부 국무위원의 주화대표단 비서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김정숙 남편인 고시복은 일본으로 건너가 쥬쿄상업학교(中京商業學校)를 졸업한 후 193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비밀 단원으로 국내외를 연결하면서 군자금 모집, 일제밀정 암살, 기밀문서 수발 등을 수행하였다. 중앙육군군관학교 제10기를 졸업하고 중국군 9사단에서 복무하던 중일전쟁 당시 쉬저우(徐州)·난커우(南口)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1940년 광복군 총사령부 전령 장교로 임명되어 중국 각지를 돌며 수십 명의 청년을 모집하는 등 광복군 병사 모집에 힘을 쏟았다. 이후 임시정부 군무부원과 내무부 총무과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기강, 1940. 6. 17.)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하다
김붕준은 귀국 이후 비상국민회의를 발기하는 등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1946년 12월 남조선과도정부 입법의원의 관선의원으로 김규식·여운형·원세훈·최동오·안재홍 등과 6인합작의원에 선출되어 헌법·선거법 기초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좌우 합작위원회 대표로서 민족통일운동 추진에 나섰다.
1948년에는 민족자주연맹 상임위원과 선전국장으로 남북협상에 관여하였다. 5·10선거에 서울특별시 성동구, 1950년 5·30선거에서도 성동 을구에서 입후보하였으나 낙선되었다. 와중에 6·25전쟁이 발발하여 7월 27일 인민군에 납북된 뒤 9월에 사망하였다.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된 독립국가 건설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