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역사

식민지 불법 수탈을 없애고자
목숨을 던지다

식민지 불법 수탈을 없애고자 <BR />목숨을 던지다
글 은예린 역사작가


식민지 불법 수탈을 없애고자

목숨을 던지다


나석주


일제강점기 잡지 『별건곤』 제39호(1931)에는 ‘조선 사람은 몇몇 부자를 제외하고 나면 똥 가래가 찢어지게 가난하다’라며 슬픈 현실을 토로하였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표면적으로 “조선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식민지배 20년이 지난 후 우리 백성들의 삶은 처참할 정도로 가난해졌다.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일제 식민통치는 자신들이 필요한 물자와 자원을 조선에서 수탈해가는 포악한 정책이었다. 그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보다 더욱 잔혹한 통치 체제로 조선인들은 굶주림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인을 힘들게 하였던 대표적인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떠올려 보자. 1908년 일본이 한국의 토지와 자원을 독점하여 수탈할 목적으로 설립한 대표적인 국책회사가 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이다. 이는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모델로 모방한 식민지 수탈 기관이었다. 이 회사는 조선의 토지를 전매한 후 5할 이상의 소작료와 춘궁기 양곡을 빌려주고 2할 이상의 이자를 받는 등 조선인들을 가난의 구렁텅이로 내몰아간 전형적인 불합리한 제도였다. 계속된 불법적이고 가혹한 수탈로 조선인들은 집단으로 조국을 등지고 해외로 이주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더욱이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하였던 핵심 기관 중 하나인 특수은행은 조선식산은행이었다. 

조선인들을 착취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두 기관을 뿌리 뽑기 위해 폭탄을 던져 결렬한 투쟁 끝에 자결한 인물이 바로 나석주였다. 조선인들의 고혈을 짜내는 배출구 두 곳을 파괴하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불태운 젊은 사나이의 결심은 목숨을 던진 독립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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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나석주의 인생 항로와 의열투쟁

의열단 단원인 나석주는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아버지 나병헌과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황해도 재령은 을사늑약 이전부터 근대교육에 의한 민족의식 앙양에 앞장섰던 지역이었다. 대한협회 해주지회는 강습소와 야학교 설립을 주요한 활동 영역으로 결의하고 시행에 노력하였다. 또한 학구(學區)의 기준을 정한 후 이를 군청과 관찰부에 보고하는 등 민족운동을 주도하였다. 군이나 면 단위로 조직된 민회·민의소·농무회 등도 주민 부담에 의한 사립학교 설립에 노력하였다. 민간의 지식 계발은 새로운 변화에 부응할 수 있는 지름길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은 의무교육 일환으로 사립학교 설립에 의한 민족교육을 시행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대한제국기 최대 비밀결사체인 신민회의 서북지역 책임자인 백범 김구는 황해도 안악에서 양산학교를 운영하였다. 하기 방학을 이용한 사범강습소는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곳에서 김구와의 운명적인 만남은 그의 인생 항로를 결정하는 ‘방향타’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후 양산학교에서 굳건한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불태우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성장할 수 있는 버팀목이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았던 나석주는 민족을 위한 살신성인의 자세로 독립운동의 뜻을 다져나갔다. 그는 1913년 21세가 되던 해에 중국 동북지역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하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독립운동을 도모하다가 1919년 3·1운동 시위 주도로 체포되었다.3·1운동이 시작되면서 청년 나석주는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장엄한 활동을 기획하게 된다. 군자금 마련을 위하여 6인조 강도로 변장해 당시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의 집에 찾아갔다. 복면을 쓰고 정중히 절을 하며 “저희는 강도가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해 군자금을 마련하려 찾아온 젊은이들입니다”라고 하였다. 최 부자는 나석주인 것을 직감하고 군자금을 전해준 뒤 강도가 들었다고 일본 경찰에 신고하는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며 그 상황을 무사히 마무리하였다. 이렇게 나석주는 김덕영·최호준·최세욱·박정손·이시태 등과 6인조 강도로 활약하며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군자금을 상하이로 보내었다. 결국 6인조 연쇄강도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게 된다. 

이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감시가 심해지자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한다. 나석주는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경무국장이며 자신의 스승인 김구를 다시 만난다. 김구의 경호를 맡아 활동하기 시작하며 스승의 지도를 받아 독립운동에 계속 참여한다. 또 이동휘가 세운 무관학교 등에서 전술전략을 연마한다. 그러던 중 유자명의 소개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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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산은행 본점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 주도

1926년 나석주의 인생에 가장 결정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로 유림대표로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김창숙과의 만남이었다. 그해 5월 김창숙과 김구는 텐진에서 국내외 정세를 토론하며 독립운동의 방향을 심각하게 모색하고 있었다. 즉 두 사람은 일제 침략자들과 친일 부호들을 제거하여 가난에 허덕이는 동포들을 구제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워야 한다는 목표로 새로운 전략을 제시한다. 김구는 이화익과 나석주 두 청년을 천거하였으나 최종적으로 결국 나석주가 결정되었다. 김창숙은 의열투쟁에 나선 나석주에게 다음과 같은 당부를 하였다. 

“민족의 고혈을 빨고 있는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가 그대의 손에 폭파되는 날 일제의 간담이 서늘할 것이며, 잠자고 있는 조선의 민족혼이 불길처럼 다시 타오를 것이오. 대의를 위한 무운(武運)을 비는 바이오.”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에 35세의 중국 산동성 출신의 마중덕이란 남자가 상륙한다. 중국인으로 둔갑한 사나이는 나석주였다. 그가 민족혼을 일깨우려 단신으로 서울로 향하는 길은 오직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기 위한 희망뿐이었다. 그는 중국인 전용 여관에 머무르며 동태를 살폈다. 먼저 식량과 자원을 수탈한 조선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이 터지지 않고 불발되었다. 일제는 폭탄을 던진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여 오히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석주는 다음 목표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습격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폭파할 결심으로 많은 일본인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고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또다시 불발되고 말았다. 결국 일본 경찰의 추격을 받으며 황금정(현재 을지로 1가) 쪽에서 결렬한 총격전을 펼치던 중 자신이 지닌 총으로 자결을 선택하였다. 나석주는 일제 경찰이 다가오는 중에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뜻을 전하고 장렬하게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000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이는 군중을 향해 조국 독립의 염원을 전달한 처절하고도 담대한 의사의 외침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하여 『동아일보』(1927. 1. 13.)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냈다. 

“동척 사옥 내부와 동문 밖, 그리고 황금정 2정목 길거리 등 사건 현장에는 핏자국이 낭자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연출하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마경관과 무장경관들이 삽시간에 황금정 일대를 에워쌌다. 실내와 길 위에 피를 흘리며 신음하고 있는 피해자들을 들것과 자동차에 실어 잇따라 병원으로 옮기는 광경은 전쟁터와 같은 아수라장이었다. 다바타 경부보는 총알이 심장을 관통해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자동차 안에서 절명하였고, 머리에 총을 맞고 문밖 돌계단 위에 쓰러져 있던 수위 마쓰모토와 가슴에 총을 맞고 길 건너편 나카니시 자전거포 앞에 쓰러져 있던 시계점 점원 기무라는 총독부병원으로 옮겨 치료하였으나 끝내 절명해 사망자는 도합 3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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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의거지(동양척식주식회사 터)에 건립된 표지석과 동상



사망 직전에도 조국의 광복을 염원

그 상황에서 경찰은 중국옷 입은 범인을 조선총독부병원 외과 수술실로 옮겼다. 범인이 자기 가슴에 쏜 3발의 총탄 중 2발은 관통하였고, 1발은 폐에 박혔다. 출혈이 심해 목숨이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었지만, 일제는 마지막까지 집요하게 그 진상을 조사하려 혈안이 되었다. 그러나 범인의 정체를 타국에서 들어온 ‘테러리스트’라고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결국 목숨이 끊어지는 상황에서 일제 경찰의 추궁 끝에 입을 열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을 『삼천리』(1931년 7월 호)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내가 나석주다, 공범은 없다”라는 말밖에는 도무지 입을 열지 않다가 그다지 고민하는 빛도 없이 오래지 않아 절명하였다.


나석주 의사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였던 김상옥처럼 1920년대 의열투쟁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1962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서울 명동 현재 외환은행 본점이며 옛날 동양척식주식회사였던 자리에 그의 늠름한 모습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나석주 의거는 수많은 애국지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친 피와 땀, 숭고한 애국정신 등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희생과 봉사로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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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의거 보도 기사 (『동아일보』 1927.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