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미주 편

하와이 한인사회의 군인양성

대조선국민군단의 결성

한국인의 터전: 미주 편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하와이 한인사회의 군인 양성
대조선국민군단의 결성

1910년대 재미 한인의 군사·외교운동2





하와이로 간 박용만은 헤이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조선국민군단을 조직하고 ‘산넘어병학교(兵學校)’를 설립했다. 비록 운영의 어려움을 겪으며 학교는 개교 3년 만에 사실상의 폐교를 맞았지만, 당시 한인사회에 항일무장투쟁의 필요성과 상무주의 정신을 고취하기에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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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민군단 낙성식(1914.08.29.)



박용만의 하와이행과 군인양성 준비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에서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은 1912년 11월 8일부터 30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의회에 참석하고, 하와이지방총회장 박상하와 함께 12월 6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박용만이 하와이로 간 이유는 그 스스로 하와이로 가기를 원한 데다 하와이 한인들의 초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서 박용만은 『신한국보』 주필에 취임해 언론 활동에 나섰고 총회장 박상하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하와이지방총회의 자치규정 개정과 법인화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회원 의무금 제도가 신설되어 재정을 든든히 하였고, 1913년 6월 9일 하와이 정부로부터 법인 인허증을 받았다. 1913년 8월 그는 『신한국보』의 명칭을 『국민보』로 바꾸고 다방면에서 하와이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박용만은 네브래스카에서 축적한 군인양성의 경험을 하와이 한인사회에 접목했다. 1913년 9월 이승만이 교장으로 있던 한인중앙학원에 광무군인 출신 태병선과 함께 교관으로 나서 학생들의 군사훈련과 군사체조를 담당했다. 이렇게 훈련받은 학생들은 중앙학원 학도대란 이름으로 국민회 창설 5주년 기념식 때 분열식에도 참가했다.
한편 경술국치 이후 군인양성을 추진하던 하와이지방총회는 기존 연무부의 조직을 이용해 1914년 2월 2일 국민회 설립 5주년 기념식 때 호놀룰루 시내에서 성대한 군 분열식을 거행하였다. 분열식에는 250여 명의 광무군인 출신들로 주축을 이루어 해군대, 군대, 학도대, 적십자대란 명칭으로 한인들이 참여했다. 분열식 직후 하와이지방총회는 3개 중대와 적십자대로 편제한 군단을 조직하기로 하고 초대 사령관으로 박종수를 선임했다. 이때의 군단은 정식 군단 조직이라 부를 수 없는 임시방편과 같은 것이었지만 하와이 한인들은 이때부터 박용만을 군단장으로 부르는 등 군단 조직에 눈뜨기 시작했다.
박용만은 군단 조직을 위한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이런 때에 박종수가 1914년 4월 8일 파인애플 회사인 ‘립비 앤 모넬(Libby&Monell)’과 975에이커의 파인애플 경작계약을 맺고 박용만의 군단 지원을 약속하였다. 계약한 경작지 가운데 카할루우는 호놀룰루에서 약 13마일 떨어진 곳으로 삼면이 구릉으로 둘러싸여 외부에 쉽게 노출되지 않아 군사훈련에 적합하였다. 박종수의 후원으로 안원규, 이치경 등 하와이 내 한인들의 후원도 잇달았고 하와이지방총회(총회장 김종학)에서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박용만은 1914년 5월부터 장정용 기숙사 건립에 착수하는 동시에 농장에서 일하며 군사훈련에 동참할 학생 모집에 착수하였다. 그리하여 1914년 8월 29일 오후 7시 160여 명의 학생과 5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오아후섬 카할루우 농장에서 대조선국민군단 낙성식을 거행했다. 공식 출범일을 국치일인 8월 29일에 맞춘 것은 독립전쟁으로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는 우리민족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낙성식을 마친 대조선국민군단은 그 다음날인 8월 30일 ‘산넘어병학교’를 개교하면서 본격적인 군인양성 교육에 들어갔다.




대조선국민군단의 조직과 영향


대조선국민군단은 사령부, ‘산넘어병학교’, 별동대로 구성된다. 사령부는 단장 박용만, 부관 태병선·구종곤, 서기 백운기, 장재 최순서와 경리부(부장 노훈, 부관 박승선), 의료부(부장 홍종훈·윤희중)로 구성되었다. ‘산넘어병학교’는 교장 박용만, 대대장 박종수, 부대대장 최찬영, 정교 정명렬을 중심으로 교장실과 4개 중대의 훈련대, 군악대, 피복창, 제피소로 구성되었다. 1916년 12월 노백린이 조명하·조명구와 함께 하와이로 온 후에는 그를 중심으로 별동대를 만들었다. 별동대는 장차 원동 즉 간도 지역에 군사학교를 설립할 계획으로 만든 특별 조직이었다.
대조선국민군단에 참여한 지도급 인물들은 대부분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참가한 학생들은 1915년 3월 당시 218명이었고 그 가운데 광무 군인 출신이 75명이었다. 학생 중에는 생계유지를 위해 입학한 사람도 많았다. 학생들의 일과는 오전 4시 기상하여 5시 식사 후 오전 7시부터 9시까지 2시간 동안, 다시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파인애플 농장에서 일하는 순서로 짜였다. 그 사이인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리고 저녁 7시부터 산술, 지리, 한문, 한글, 『군인수지』, 어학(영어, 일어) 등 학과 공부를 했다. 그러나 매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노동 때문에 저녁 학과 수업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대조선국민군단의 운영을 어렵게 한 것은 재정 문제였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15년 10월 카후쿠의 제당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 농장에 나가는 대신 공장에서 일한 학생들은 자신의 수입(월수입 약 21달러) 중 70% 이상을 군단에 냈는데 그럼에도 군단 운영은 쉽지 않았다. 힘든 노동 속에서 학생들은 매일 오전 4시 30분 기상해 5시에 조반을 먹고 5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일했고 오후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학과 공부에 매진했다. 매일 고된 노동의 피곤함을 무릅쓰고 학과 수업을 받는 학생들의 열정과 열의는 대단했다. 하지만 고된 일과를 견디지 못하고 떠나는 학생들도 있었다.
박용만은 군단의 조직과 운영을 안정시키고 활성화하기 위해 의연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국내외 한인들과 교섭하였다. 대외 교섭의 성과로는 박용만을 만난 장일환이 1917년 3월 23일 백세빈, 배민수 등과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결성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런데 1916년 들어서 군단에 대한 하와이 내 일부 한인들의 반대 여론과 하와이주재 일본총영사관의 방해공작, 하와이 정부의 압박 등으로 군단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1917년이 되면 사실상 폐쇄되고 만다. 네브래스카에서 하와이로 이어진 박용만의 군인양성의 꿈은 하와이에서 오래가지 못했지만 3·1운동 직후 그가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북경에 간 뒤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되었다. 또 그가 뿌린 항일무장투쟁의 씨앗은 미주 한인들에게 상무주의 정신을 고취해 1920년 노백린의 윌로스 비행학교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