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다 간 지도자

김구

이달의 독립운동가



글 전시부    



민족과 국가를 위해 살다 간 지도자

김 구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와 공동으로 김구를 2019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던 김구는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로 활약하며 독립운동에 전 생애를 바쳤다.






alt




다양한 활동을 모색하며 독립운동가로 거듭나다


김구는 1876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17세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듬해인 1893년 동학에 들어간 그는 동학농민전쟁에서 황해도 지역 동학군 선봉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유학자 고능선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중국을 왕래하던 중, 1896년 3월 황해도 안악의 치하포에서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복수 의거로 일본인 쓰치다를 처단했다. 이 때문에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 등지에서 승려로 지냈다.
이후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한 김구는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교육 사업에 힘을 쏟았다. 1908년에는 황해도 지역 교육계몽단체인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고 학무총감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에도 가담했으나 또다시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때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으로 삼으며 ‘평범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나라사랑 정신을 고취하겠다’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도자로 활약하다


44세가 되던 1919년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김구는 상하이에 위치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후 경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 요인 경호 등을 맡았고 내무총장과 국무령, 국무위원 등을 맡아 임시정부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임시정부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면서 점차 침체에 빠지자 최소 인원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고자 특무공작을 계획하고 한인애국단을 결성했다. 이어서 이봉창·윤봉길 의거 등을 주도하며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당당히 알렸다.
김구는 일본군의 중국 침략으로 중국 여러 도시를 옮겨 다니다가 65세인 1940년 충칭에 정착하여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인 주석으로 활동했다. 충칭에서 그는 임시정부의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역량을 하나로 모으고자 좌우통합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국내진입작전을 추진했다.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한 후 1945년 11월 환국한 그는 좌우 남북 대립이 심화되자 하나 된 조국을 위해 노력을 계속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서거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alt

김구(金九)

1876.08.29. ~ 1949.06.26.  

alt

김구 가족사진(1922)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시절 촬영한 가족사진으로 왼쪽부터 김구,

큰아들 김인, 아내 최준례의 모습이 보인다

alt

김구가 머물던 마곡사

건물 탈옥한 김구가 6개월간 은거한 마곡사 건물로,

현재는 ‘백범당’이라 부르고 있다


             

alt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1941.12.10.) 

대일선전성명서에는 대한민국이 연합군의 일원이 되어 일본과 맞서 싸우겠다는 내용이

있으며, 좌측 하단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도장이 보인다

alt

김구 서명문 태극기 

김구가 선교 활동을 하던 벨기에 신부에게 전한 태극기로 조국 광복을 위한

노력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alt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환국 기념사진(1945.11.)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광복 직후인 1945년 11월 3일 귀국을 앞두고 중국 충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