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백마를 탄 김장군

김경천

역사를 만든 사람



글 임영대 역사작가


백마를 탄 김장군

김경천




김경천의 본명은 김광서(金光瑞)로 188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무관 김정우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유학파인 부친과 마찬가지로 일본으로 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3·1운동 후에는 일본군을 탈영하여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수많은 싸움을 치르며 용명을 떨쳤으나 말년에는 소련 당국에 의해 강제수용소에 갇혀 시베리아 얼음 속에서 쓸쓸히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여 그 넋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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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과 그의 아내 유정화

  





나는 유학생이었다가 일본 장교가 되었다. 아아, 나의 앞길은 이다지도 변화가 많은 것일까.


김경천은 대대로 군무에 종사한 무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가풍을 따라 그 역시 무관이 되기를 꿈꾸었고, 이를 위해 일본 유학을 갔다. 당시 조선 무관 중 가장 엘리트라고 하면 당연히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한 이들이었다. 부친 김정우 역시 일본에서 유학하고 대한제국 육군 군기창장으로 재직하였으며, 아들의 꿈을 지원해주었다. 김경천은 1904년 황실유학생단 일원으로 유학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 23기생으로 입교했다.


"6백 수십 명의 일본 학도가 처음으로 약소국 사람인 내가 입학한 것을 기이하게 여긴다. 나는 형형한 눈으로 그들을 보며 한마디 말이라도 함부로 아니하고 코웃음은 고사하고 그들한테 행동으로도 녹록지 않음을 보여준다."


언젠가는 재건될 한국군의 간성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이들이 힘든 교육을 견디고 있는 사이 이변이 일어났다. 경술국치로 국권이 완전히 일본에 넘어간 것이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혼란스러웠다. 학교를 그만두고 돌아갈 것인가, 일본군 장교가 될 것인가. 몇몇 생도들은 퇴교를 택했다. 그러나 김경천을 비롯한 대다수는 잔류했다. 원수인 일본의 군대이지만, 독립전쟁에 활용할 수 있는 군사지식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11년 일본군 기병 소위로 임관한 김경천은 후배인 조선인 장교들과 친목회를 조직했다. 이들은 비록 일본군 내에서일지언정 조선인으로서의 의식을 잊지 않도록 했다. 더러는 먼저 일본군을 떠나기도 했지만 김경천은 때를 기다렸다.




아는 벗들이 나더러 칼을 빼시오, 인제는 별수 없으니 칼을 빼시오 하며 여럿이 권한다.


때를 기다리며 일본군에 복무하던 김경천은 중위가 되었다. 그때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있었다. 여기에 감명을 받은 김경천은 병가를 내고 귀국하여 조국의 형편을 살폈다. 그리고 3·1운동의 현장을 보았다. 3년 후배인 지청천(이청천)은 5월 하순에 귀국했다.


"동대문 안 부인병원 앞으로 청년단이 가서 만세를 부르니 그 간호부들이 모두 울면서 만세로 응답함은 나의 마음을 더욱 분하게 한다. …청년회관에 있을 때도 아는 벗들이 나더러 칼을 빼시오, 인제는 별수 없으니 칼을 빼시오 하며 여럿이 권한다."


김경천은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마침내 일본군을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주변 시선을 속이기 위해 낮에는 당구장, 밤에는 술집을 전전하다가 그해 6월 지청천과 함께 압록강을 넘어 마침내 독립 대열에 합류했다.
당연히 일본군에서는 난리가 났으나 두 사람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만주에서 대한독립청년당과 신흥무관학교 등에 들어가 활동하며 자신들이 익힌 군사지식을 동포 청년들에게 가르쳤다. 1920년에는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러시아령 연해주로 갔는데, 이 여행이 김경천의 명성을 불후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연해주는 적백내전의 여파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짜르 통치를 무너뜨린 적군과 구체제 복귀를 외치는 백군이 싸우고, 여기에 이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이 끼어들어 백군의 편을 들었다. 치안이 무너진 틈을 타 마적들도 날뛰었다. 일본군은 조선인과 러시아 주민들이 항일운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무기를 압수하고 마적들을 부추겼다. 김경천은 동포들을 학살하는 마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대를 조직하여 분투했다. 그리고 마적, 마적이나 다름없는 백군,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용명을 떨쳤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할 수 있었다. 김경천은 러시아 적군과 손을 잡고 일본군과 백군을 상대로 한층 더 가열한 혈전을 벌였다. 독립군의 규모 확대와 무장 확충도 진행했다. ‘백마를 탄 김장군’의 명성은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동아일보』가 김경천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지면에 게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라 없는 군대는 오래갈 수 없었다. 백군을 완전히 제압하고 일본군이 철수하자 적군 사령부는 한인 독립군을 해산시켰다. 김경천은 총을 놓아야 했고, 1936년에는 일본 간첩이라는 혐의를 받고 강제수용소에 투옥됐다. 1939년 형기를 마치고 잠시 석방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수감되었다. 시베리아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이감된 김경천은 1942년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김경천이 투쟁에 나선 기간은 불과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2년간 쌓은 업적은 전설이 되었다. 백마를 타고 만주를 누비는 김장군의 이미지는 영원히 남았다. 건국훈장 대통령장 외에도 국가보훈처는 2003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전쟁기념관은 2016년 1월의 호국인물로 김경천을 선정하여 독립을 위해 싸운 군인으로서의 업적을 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