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독립전쟁, 무장으로 일군

자주독립의 희망

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독립전쟁, 무장으로 일군

자주독립의 희망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다. 만주에 많은 독립군 부대가 만들어졌다. 대한제국기에 군인이었거나 의병장이었던 이들이 지휘부가 되어 독립군 부대를 통솔했고,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들은 3·1운동의 경험을 공유하며 새로운 길을 찾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독립전쟁으로 자주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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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포고 제1호



1920년, 독립전쟁의 해


3·1운동이 보여준 독립의 열망은 만주에서 수많은 무장단체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는 19세기부터 일궈 온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10년대에 축적한 역량이 결집된 결과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만주에서 군자금과 장병을 모집하고, 무기, 식량, 군복 등을 마련하고 사관을 양성하고 병영을 건설하는 등 독립군기지 건설에 힘썼다. 이를 바탕으로 1919년 무렵 만주에서는 크고 작은 독립군 부대가 활동했다. 북간도에서는 안무를 총사령으로 하는 대한국민회군,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하는 대한군정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 김규면의 대한신민단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간도에는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로군정서를 비롯해 대한독립단, 대한독립군비총단 등이 있었다.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원 포고 제1호’로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했다.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에 나설 것을 천명하자 곧 국내외에서 즉각적인 개전을 압박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3월 2일 이동휘는 임시의정원에서 독립운동의 최후 수단인 전쟁을 개시해 승리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해야 할 준비사항 14개 항을 담은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3월 30일에는 윤기섭 등 5인이 ‘군사에 관한 건의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건의안은 5월 중 적당한 시기에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만주로 군사업무와 관련한 기관들을 옮기며 10~20개의 보병연대를 편성하고 사관과 준사관 약 1,000명을 양성해 1920년 안에 전쟁을 개시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즉각적인 개선론인 셈이었다. 이렇듯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할 무렵 만주에서는 활발한 국내진공작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 경찰 기록에 따르면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에만 1,600여 회의 국내진공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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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승전 보도기사(『독립신문』, 1920.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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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적들에게 파괴된 훈춘(혼춘)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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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 기록화(1920.10.)  



독립군의 승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1920년 5월 북간도에서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와 안무의 대한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를 조직했다. 최진동이 사령관을, 안무는 그의 부관을 맡았다. 홍범도는 군사지휘권을 갖는 북로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가 화룡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있을 무렵, 국내진공작전을 펼친 대한신민단을 추격하던 일본군 1개 대대가 두만강을 건너 봉오동에 들어왔다. 6월 7일 오전 봉오동에서는 대한북로독군부와 일본군이 전투를 벌였고 지형을 잘 알고 있었던 대한북로독군부는 이를 이용하여 일본군을 격퇴했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본격적인 독립군 ‘토벌’에 나섰다. 1920년 8월 독립군을 초토화한다며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간도 출병의 명분을 마련하고자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중국인 마적을 매수해 훈춘의 민가와 일본영사관을 습격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곧바로 군대를 간도에 출병시켰다. 간도 출병을 예상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아직 일본군과 정규전을 하기에 역부족이었기 때문에 전면전을 피하고자 8월 하순부터 본거지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10월 중순에 회의를 열어 전투를 피하되, 만일 공격한다면 깊은 산속으로 유인해 유격전으로 기습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내 독립군과 일본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전을 벌였다. 이때 전투에 나선 독립군 부대로는 김좌진의 대한군정서와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를 망라해 홍범도가 이끌던 연합부대가 있었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의 대한군정서가 백운평에서 전투를 벌이며 시작되었다. 대한군정서는 백운평에 이어 천수평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다. 완루구에서는 홍범도의 연합부대가 전투를 벌였다. 어랑촌에서는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들이 함께 지형의 유리함을 이용해 일본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전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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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군무도독부 부장 최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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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민회군 총사령 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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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총사령 홍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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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군정서 사령관 김좌진

 



승리를 이끈 독립군 지휘부


1920년 독립전쟁의 해에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독립군 지휘부에는 최진동, 안무, 홍범도, 그리고 김좌진 등이 있었다. 봉오동 전투를 지휘한 최진동은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서 중국 국적을 획득하고 중국군에 들어가 활동했다. 대한군무도독부를 결성할 무렵 그는 봉오동에서 재산도 있고 명성도 높은 유력자였다. 집에 장벽을 쌓고 사방에 포대를 지어놓고 자위단을 설치했던 토호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재산을 들여 독립군 부대인 대한군무도독부를 결성했다.

대한국민회군을 이끌었고 대한북로독군부에서 최진동을 보좌했던 안무는 1883년생으로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이다. 그는 대한제국 진위대 병사로 출발해 하사관과 교련관양성소를 거쳐 함경북도 무산 등지에서 교련관으로 근무했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이후에는 함경북도의 사립학교들에서 체육교사를 지냈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안무는 만주로 망명했다.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중 1919년 대한국민회 산하의 대한국민회군 300여 명을 거느린 사령관에 취임했다.

홍범도는 1868년생으로 평안남도 양덕에서 태어났다. 그는 19살이 되던 해인 1887년 평양의 친군서영에 입대해 3년간 군대생활을 한 후 광산노동자로 살았다. 1893년부터 1907년까지 14년 동안은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포수 생활을 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포수와 청년 200여 명을 모아 북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1910년 봄에 간도로 망명할 때까지 함경도 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일본군과 끈질기게 싸웠다. 간도로 망명한 후에도 국내진공작전을 벌이는 등 의병투쟁을 이어갔으나 결국 전력 소진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홍범도는 1913년 연해주로 망명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동회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았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5월 홍범도는 다시 북간도로 건너와 200여 명 규모의 독립군부대인 대한독립군을 창설했다. 그리고 국경에 자리한 혜산진의 일본군 수비대 공격을 시작으로 연이은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대한독립군은 안정적인 무기와 병참 보급을 위해 간도의 한인 자치결사체인 대한국민회 산하로 들어갔다.

김좌진은 1889년생으로 충청남도 홍성군 출신이다. 서울에서 무관학교를 다녔으나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기호흥학회에 가입하는 등 계몽운동에 힘썼다. 대한제국이 망하자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가 구속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출옥 후 대한광복회 만주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군자금 모집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으나 면소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던 중 경찰에 포착되자 만주로 건너갔다. 김좌진은 3·1운동 직후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할 때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또한 대종교에서 만든 자치결사체인 대한정의단의 군사책임자가 되었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부대로서 대한군정회를 조직했다.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해 대한군정부를 만들 때 사령부를 맡았다. 대한군정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 공인되면서 이름을 대한군정서로 변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