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읽는 역사

독립운동자금을 모아라!

자료로 읽는 역사



글 김경미 자료부 학예연구관



독립운동자금을 모아라!

영수증으로 보는 미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어떤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죽기를 원하는가?” 물으면, 나의 최대 소원은 독립이 성공한 후 본국에 들어가 입성식(入城式)을 하고 죽는 것이며, 작은 소망은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고 돌아오다 비행기 위에서 죽으면 시신을 아래로 던져, 산중에 떨어지면 짐승들의 뱃속에, 바다 가운데 떨어지면 물고기 뱃속에 영원히 잠드는 것이다. 『백범일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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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 대한민국공채표(독립공채)(1920.06.28.)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자금을 대표하는 일명 독립공채로, 주차구미위원부에서 발행한 100달러 대한민국공채표이다. 구미위원부의 ‘공채권조례’에서는 10달러, 25달러, 50달러, 100달러, 1,000달러 등 5종의 공채표를 발행한다고 했으나, 임시정부에 보고한 문서에는 500달러를 포함한 6종으로 되어있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에는 5달러 공채표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고락을 같이했던 김구는 『백범일지』를 마무리 하며, 죽기 전의 작은 소망이 미주·하와이 동포들을 만나보는 것이라 기록했다. 오랜 기간 임시정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재정적 뒷받침을 해 준 미주 한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와이 노동이민으로 시작하여 미주에 정착한 한인들은 독자적인 한인사회를 유지·발전시키는 한편 조국의 독립운동을 돕는데 헌신적이었다. 국민과 떨어져 나라 밖에 자리 잡은 임시정부에게 미주의 한인사회는 다른 국외 한인사회보다 수적으로는 훨씬 적었으나 재정적으로는 가장 큰 의지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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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한민국인구세 영수증(1919.09.25.) 

대한민국 1년도(1919년) 대한민국 인구세 1달러를 납부한 박술이에게 1919년 9월 25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수세총위원 백일규의 명의로 발급한 영수증이다. 박술이는 그즈음의 주소가 와이오밍주 슈퍼리오로 되어 있어 그곳의 석탄광에서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는 부인, 4남매와 몬타나주 부트에 거주하며 대한인국민회 몬타나 지방회 수전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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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애국금 영수증 양식에 발급한 광복군후원금 영수증(1941.03.01.) 

이 자료는 애국금 영수증 양식에서 ‘애국금’ 윗부분에 ‘광복군후원금’이라는 도장을 찍고 1941년 3월 1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상무부 총무인 김병연의 명의로 발급한 광복군후원금 영수증이다. 광복군후원금은 1940년 9월에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군대로 조직된 한국광복군을 지원하기 위한의연금이다. 50센트를 낸 박광세는 자료02의 인구세를 냈던 박술이의 아들이다. 박광세는 동생인 찬세와 각각 50센트의 광복군후원금을 냈으며, 두 형제는 이후 미일전쟁에서 지원병으로 복무하게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 수입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국민에 대한 조세 성격의 인구세, 자발적 헌금인 애국금, 대내외 공채 발매 등 세 가지를 재정 수입의 근간으로 삼았다. 먼저 인구세를 보면, 1919년 6월 15일 임시정부령 제3호로 ‘임시징세령’과 ‘인구세시행세칙’을 정했다. 국내외 만 20세 이상의 남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개납주의(國民皆納主義)를 원칙으로, 국외에서는 거류민 자치단체가 징수사무를 집행하도록 했다. 미주 지역에서는 미주 최대의 한인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이하 국민회)의 중앙총회에 수세사무를 위임했다. 이때의 인구세 영수증(자료02)에는 국민회 중앙총회의 인구세 징수가 임시정부의 법령에 의거한 것임이 명시되어 있다. 국민회 중앙총회는 1919년에 총 1,122달러의 인구세를 징수했다. 1인당 1달러 정액이었으므로 모두 1,122명이 국민으로서 인구세를 낸 것이 된다.

인구세와 함께 임시정부에서는 개인의 의연에 의한 애국금수합제도를 마련했다. 임시정부 재무총장 명의의 신표(信標)를 가진 애국금수합위원들을 국내외로 파견했으며, 미주에는 국민회 중앙총회에 ‘애국금수합위원 신표 제50호’를 발급하여 애국금 모집을 위임했다.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발급하던 애국금 수합증 양식(자료03)에는 “반만년 피로 지킨 조국이요 억만 대 후손의 자유의 낙원일 국토를 광복하려는 외교비와 군사비를 위하여 전력하라”고 하며 국민회 중앙총회에 관할지방의 애국금 수합사무를 지시하는 1919년 6월 21일 자 임시정부 재무총장 최재형의 명령이 인쇄되어 있다. 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미주와 멕시코 두 곳에서 8월 30일부터 모금 활동을 시작하기로 하여 1919년에 18,686.23달러의 애국금을 모았다.

임시정부는 또한 재정의 근본 재원으로 독립공채를 발행하기로 하여, 공채의 명칭을 ‘대한민국원년 독립공채’로 정하고 1919년 12월 1일 공채를 발행했다. 이에 앞서 임시정부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구미주차한국위원부(이하 구미위원부)에서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국민회에 위임했던 애국금 제도를 폐지하고 구미위원부의 공채표 판매로 대신하기로 했다. 구미위원부에서는 미주 전 지역을 북미서방, 북미동방, 멕시코, 하와이의 4구역으로 나누어 공채표를 발매했다. 공채금은 4기로 나누어 낼 수 있었으며, 공채금을 내면 영수증(자료04)을 주고 공채금을 다 납부했을 때 그 사실을 증명하는 증서로 해당 금액의 공채표(자료01)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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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공채금 영수증(사본)(1920.12.03.) 

멕시코 구역 탐피코 지방에 사는 백곤차가 공채금 10달러를 제1~2기조로 낸 것에 대해, 대한민국 2년(1920년) 12월 3일 주차구미위원부 장재 현순의 명의로 발급한 영수증이다. 백곤차는 대한인국민회 탐피코 지방회에서 활동하던 김익주의 부인으로, 1905년 가족이민으로 멕시코에 이주했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에는 백곤차의 맏아들인 김동철의 40달러 공채금 영수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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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독립의연 영수증(1919.05.02.) 

독립의연으로 15달러를 낸 최응칠에게 1919년 5월 2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재무 강영소의 명의로 발급한 영수증이다. 1916년에 학생 신분으로 도미한 최응칠은 1919년 5월 26일에는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독립의연 모집과 인구등록을 위해 각 지방에 파출소를 설치할 때 유타주 쏠렉 지방 파출위원으로 서임됐다



미주 한인들, 독립을 위해 힘돈을 모으다


미주 한인 단체들은 위와 같은 임시정부의 재정정책과 관련된 모금뿐 아니라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다양한 명목의 의연금을 모금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3·1운동 직후와 중일전쟁이 미일전쟁으로 치닫던 시기의 의연금 모집을 살펴보기로 하자.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한 사실이 미주에 알려지자 한인사회에서는 3·1운동을 지원하고 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대대적인 의연금 모집운동을 전개했다. 3월 13일에 열린 국민회 중앙총회 임시위원회에서는 “북미, 하와이, 멕시코 동포의 이번 대한독립단 응원에 대한 책임은 재정 공급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하며, 이번 의연을 ‘독립의연’이라고 이름하고 각 지역에 임시파출소를 설치하여 의연금을 모으기로 했다. 독립의연 영수증(자료05)에는 “왜놈들이 우리의 애국 여학생의 팔을 칼로 자르던 참상”을 보여주는 삽화와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마지막 방울의 피가 흐르기까지 싸우기로 결심”, “우리는 장래 자손에게 비참과 치욕을 끼쳐주지 않고 영원한 자유행복을 유전하기로 결심”이라는 각오가 실렸다. 1919년에 모집된 독립의연은 42,625달러였으며, 이 해에 국민회에서 임시정부로 송금한 30,600달러에는 임시정부의 위임을 받아 징수한 인구세와 애국금 총 19,808달러 외에 자체 모금이었던 독립의연도 포함되어 있었다.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이 확대되고 임시정부가 1940년 충칭으로 옮긴 후 한국광복군도 창설되었다.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단체별로 이루어지던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통일하기 위해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이하 연합회)를 결성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금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사용할 모든 재정을 ‘독립금’이라 칭하고, 모든 독립금은 연합회로 납부하기로 했다. 연합회가 발행한 독립금예약서(자료06)에는 “1941년 12월 11일에 한국 임시정부는 대일선전을 포고하였으므로 나는 재정과 성력을 바쳐서 조선독립이 실현될 때까지 독립금을 예약하고 필납키를 맹세함”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으며, 매달 낼 금액과 총액을 적게 되어 있다. 연합회는 예약서를 작성한 사람이 독립금을 낼 때마다 독립금 영수증을 발급했다. 1941년 5월부터 1948년 말까지 연합회의 독립금 수입은 149,482달러였고, 그중 58,202달러를 임시정부 후원금으로 사용했다.

임시정부의 재정수입 상황을 보면, 성립 초기 국내에서 반입된 자금을 제외하면 수입금 대부분은 미주에서의 후원금이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조국의 국권 회복을 자신의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일보다도 더 큰 과제로 생각하고, 2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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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독립금예약서(1942.01.30.)  

하와이 호놀룰루에 사는 전경무가 1942년 1월 30일 매달 12달러 50센트씩 총 150달러의 독립금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내겠다고 한 예약서이다. 독립기념관 소장자료에는 이 예약서와 함께 정경무가 12달러 50센트씩 독립금을 낸 영수증 총 7장이 있다. 전경무는 당시 연합회의 하와이의사부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광복 후 올림픽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한국이 런던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도록 외교활동을 하던 중 비행기 사고로 순직했다

     




※ 자료는 전명운기념사업회, 허영희, 최영보, 전인(Bassil I. Dunn) 님이 기증해 주신 것입니다. 독립기념관의 연구와 전시, 교육을 위해 소중한 자료를 기증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독립기념관 전시관에서 다음의 자료를 실물로 보실 수 있습니다.
 - 자료01 (제6관 새나라세우기)
 - 자료05 (제7관 특별기획전시실, 8월 11일까지)


참고
고정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미주지역 독립운동 - 재정문제를 중심으로」, 한국근대사학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
윤대원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반기(1919-1932)의 재정제도와 운영」, 한국근대사학회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80주년기념논문집(상)』,  국가보훈처,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