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강의 구금지
샤먼(廈門)일본영사관 건물

이강의 구금지<BR />샤먼(廈門)일본영사관 건물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이강의 구금지

샤먼(廈門)일본영사관 건물


부두에서 내리자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수많은 인파들이 구랑위(鼓浪屿)의 아름다움에 취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일행은 너무 갈증이 나서 그랬는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야자수 음료 노점상 앞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 와서 이정도 호사(?)는 누릴 만하지. 흔쾌히 노점상에게 80위안을 지불하고 일행에게 음료를 나누어 주었다. 각자 하나씩 자연산 야자수를 손에 들고 시원하게 들이키는 모습을 보면서 열흘 동안 답사했던 일행의 노고가 조금이라도 해소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구랑위에서 샤먼 일본영사관을 방문하다

우리보다도 훨씬 이전에 이곳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유기석은 구랑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산 위에는 많은 괴석이 툭 튀어나와 경치를 돋보이게 하고, 특히 아름다우며 항구에는 옥외 대포가 설치되어 이곳이 해상 요충지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항구는 넓고 물은 깊어서, 수천 톤의 증기선을 직접 부두에 댈 수 있었다. (중략) 만일 샤먼(厦門)을 구룡(九龍)에 비유한다면 구랑위는 바로 홍콩과 매우 닮았다. 비록 구랑위의 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울지라도 그곳은 가난한 민중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 못되어 절대 다수의 주민은 소위 ‘고급중국인’ 즉 자본가와 매판계급에 속하였다.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곳곳에 웨딩사진을 찍으러 온 예비 신혼부부들이 눈에 띄었다. 일본영사관은 영국영사관 부근에 있었다. 2층 붉은 벽돌로 지어진 샤먼 일본영사관은 대지 300평 규모에 연건평 100평 정도의 건물을 포함하고 있다. 건물 1층에 널려 있는 빨래를 보고 지금도 주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사관 내부는 각자 맡은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느라 분주했다. 한쪽에는 이강이 체포된 후 수감되었던 ‘샤먼 일본영사관 경찰감옥’이라는 표지석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중국인 여학생 두 명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어디에서 왔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이곳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수감되었던 장소여서 조사를 나왔다고 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고향이 안후이성(安徽省)이라던 두 여학생은 다시 우리와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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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 일본영사관 경찰감옥 표지석


미국에서 러시아, 중국까지 세계를 누빈 삶

이곳에 수감되었던 이강은 어떤 인물인가. 이강은 의친왕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인물은 샤먼 일본영사관에 수감되었던 독립운동가로, 평안남도 용강군 봉산면 황산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2년 미주개발회사(美洲開發會社)에서 추진하는 이민 모집에 합류해 하와이 소재 영어학교에서 수학하고 이듬해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안창호를 만났다. 이를 계기로 안창호·정재관 등과 함께 1904년 교민단체인 공립회(共立協會)를 창설했고, 1905년 11월에는 동지들과 함께 <공립신문(共立新聞)>을 창간하여 주필이 되었다.또한 1907년 초에는 안창호와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기로 하고 안창호를 먼저 귀국시킨 뒤, 그도 귀국하여 양기탁을 중심으로 국내 동지들과 함께 1907년 4월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창립하였다.

그리고 이강은 몇 달 후에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신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를 설치하였다. 1909년 2월에는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단체로서 미주지역에서 종래의 공립협회가 확대 개편되어 재미주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가 조직되자, 정재관 등과 함께 이에 보조를 맞추어 재로대한인국민회(在露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해 각 지방과 지회를 설치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지들과 함께 <해조신문(海潮新聞)>을 창간, 편집 논설기자로 활동했으며 후에 <대동공보(大東共報)>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편집책임을 맡았다. 이강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이 대동공보사에서 수립될 때 그도 참석하여,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포살의 특공대로 하얼빈에 나갔을 때 안중근과 대동공보사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 의거가 성공한 후에는 그의 구명을 위한 영국인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베이징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대동공보>가 일본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 당하자, 이강은 시베리아 치타(Chita)로 가서 다시 <정교보(正敎報)>라는 신문을 발행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9년 9월 러시아 노령(露領)에서 파견된 강우규가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한 사건이 일어났을 땐 연루자로 지목되어 일경에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약 50일간 구금되었다. 1919년 말 석방되자, 바로 상하이로 탈출해 안창호를 만나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의정원(議政院) 부의장 및 의장을 역임했으며, 흥사단(興士團)운동에 진력하여 흥사단 원동지방위원회(興士團遠東地方委員會)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세력이 양쯔강(長江) 일대까지 뻗치게 되자, 상하이를 떠나 남중국 방면으로 갔다. 이강이 머무른 태백산상회는 1927년경부터 푸젠성(福建省) 샤먼의 안창호의 흥사단 계통 사람인 정(鄭)씨가 차린 가게로 인삼과 홍삼을 팔고 있었으며, 동시에 독립운동가들의 연락 장소 역할도 했다. 이강은 당시 임시정부의 부의장직에 있었지만 생활이 너무 어려워 인삼을 구해다 팔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1928년 일경이 사주한 대만 사람이 태백산상회를 습격해 납치된 이강은 샤먼 일본영사관 감옥에서 수감하게 되었다.

샤먼 일본영사관을 조사한 우리는 다시 선착장으로 갔다. 시간은 벌써 저녁 6시가 다되어가고 있었다. 영사관 촬영과 구랑위의 풍경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배를 다시 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내일을 기약하며 샤먼에서의 후덥지근한 밤은 그렇게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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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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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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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무더위 속에서 이강 활동지를 찾아 헤매다

다음날 평소보다 조금 늦은 9시경부터 이강이 활동했던 태백산상회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 장소는 바로 중산로(中上路)였다. 100년 전 건물들로 즐비한 중산로에서 태백산상회를 아는 이를 찾기란 ‘한강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 주로 나이 많은 중국인들을 탐문대상으로 삼았지만 허사였다. 상업가이자 화교은행이 있던 터를 알려주는 분들이 있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원기 연구원은 연신 이마의 땀을 닦으며, 광저우의 더위는 샤먼의 무더운 날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 큰 성과 없이 이강의 활동지를 찾지 못한 우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그늘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답사의 방향성에 문제가 있음을 직시하고 다시 탐문에 나섰지만 몸만 고되고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샤먼에서의 한국독립운동사적지 찾기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좀 더 철저하게 아니 좁은 지역을 세밀하게 조사하는 방향으로 사적지 조사가 변모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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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먼 중산로


이번호를 끝으로 광저우와 푸젠성의 사적지 답사기는 끝을 맺는다. 다음호부터는 후난성(湖南省) 창사와 푸양(?陽)등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활동 무대에 대한 답사기를 연재한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