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안중근의 영원한 반려자, 김아려 여사
둘,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간 두 범종의 운명

하나, 안중근의 영원한 반려자, 김아려 여사<BR />둘,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간 두 범종의 운명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김형목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안중근의 영원한 반려자, 김아려 여사


예수를 찬미하오.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제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머지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에 모이려 하오. 반드시 감정에 괴로워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어머님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육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심신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의 즐거움을 바랄 뿐이오. 장남 분도(세례명)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 그리 알고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께 바치어 후세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많고 많은 말을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1910년 경술 2월 14일


장부 도마(토마스多默) 올림



alt

순국 직전의 안중근
alt

김아려 여사와 자녀 사진


유언에서 ‘인간 안중근’을 보다
3월 26일은 하얼빈 의거의 주역 안중근 의사가 차디찬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날로, 최소한 한국인이라면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다. 1910년 그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 그가 부인에게 남긴 유언은 ‘인간 안중근’의 진정한 면모를 보여준다.
안중근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감히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의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장남 분도를 꼭 신부로 키우라는 완곡한 부탁도 한다. 어머니께 효도하고 형제들과 화목한 생활을 강조하는 평범한 남편이었다. 이승에서 못다 이룬 꿈은 천당에서 자세히 이야기하자는 맹세도 잊지 않았다. 그가 진정 무엇을 위하여 하얼빈 의거를 결행했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눈물겨운 대목이다. 가슴 뭉클하면서도 담담하게 써내려간 편지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안중근의 반려자가 되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 중 상당수는 안중근 부인이 김아려(金亞麗)라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기록도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과연 그녀는 어떠한 인물인가. 1878년 황해도 재령군 향반(鄕班)인 김홍섭 딸로 태어난 김아려는 일찍이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비교적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1894년 1살 연하인 안중근과 백년가약을 맺어 슬하에 1녀 2남을 두었다.
시집살이는 만만치 않았다. 시아버지 안태훈과 남편은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출전했다. 살림살이는 고스란히 시어머니 조마리아와 그녀의 몫이었다. 독실한 신앙생활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는 정신적인 지주였으며, 시어머니의 따뜻한 인정과 배려는 자신감·자긍심으로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다.


남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
남편 안중근은 항상 새로운 변화에 부응하려는 다양한 활동에 앞장섰다. 파격적인 행보로 천주교단이나 외국인 신부와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진남포로 이사하고는 삼흥학교를 설립, 돈의학교를 인수·운영하는 등 교육구국운동에 노력했다. 삼흥학교가 재정난에 직면했을 때는 처남인 김능권(金能權)이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던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안중근은 가족들에게도 참여를 권장하였다.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그의 경제활동은 이러한 인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시어머니, 동서와 함께 김아려도 시집오면서 가져온 패물을 내놓을 만큼 열성적으로 나섰다.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안중근은 망명길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909년 10월 26일 오전,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역두에서 저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때부터 김아려는 자식들 양육은 물론 가족들 생계까지 책임지는 숙명을 맞이했다. 결국 이듬해 3월 26일 뤼순감옥에서 안중근은 순국했다.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이었다.


2월 14일을 기억해야 할 이유
이후로도 일제의 추적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집요했다. 김아려와 가족들은 러시아와 중국 곳곳으로 옮겨 다니며 추적을 피하는 ‘하루살이’ 같은 삶을 살았다. 그 가운데 장남이 일제에 독살되는 등 사무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피난살이는 계속 이어졌다.
더욱이 작은 아들은 강제로 국내에 압송되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분키치에게 아버지의 죄를 사죄하고 ‘의형제’를 맺는 퍼포먼스에 속수무책 동원되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각색·연출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김아려는 이 비극적인 소식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늘 냉철한 지혜를 발휘하는 ‘어머니’였다.
1945년 8월 가슴 벅찬 광복이 찾아왔다. 그러나 김아려는 귀국하지 못한 채 이듬해 중국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남편과 함께 무덤조차 확인되지 못하고 영영 고혼(孤魂)으로 남고 만 것이다.
지난 2월 14일 많은 청춘남녀들이 이날을 ‘발렌타인 데이’라며 서로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냈을 것이다. 이 같은 현실을 비난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107년 전 그날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고 아내에게 애틋한 유언을 남겼던 날이라는 것 또한 기억했으면 한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간 두 범종의 운명


1937년 중국을 침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미·영 연합군의 반격으로 벼랑 끝에 몰리게 되었다. 패색이 짙어지자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일제는 ‘총후(銃後)의 정신 협력’이라며 강제적인 금속류 공출령을 내렸다. 


           

alt

공출명령서
alt

태평양전쟁 당시 공출된 그릇들


쇠붙이 공출로 수난 받은 범종
친일 단체나 친일 불교계 인사 등 조선총독부의 앞잡이들을 내세워 일반 가정집의 밥그릇·수저·제기·가마솥·다리미·요강은 물론이고, 사찰과 교회의 동종·철불·기타 금속류를 강제로 빼앗아갔다. 물론 쇠붙이를 녹여 무기를 만들 심산이었다. 일제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모아들인 쇠붙이는 그들이 해외에 세운 병기창 가운데 하나인 인천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으로 보내졌다. 그곳은 1940년 4월에 세워진 무기 공장으로, 매달 소총 4천 정·소총 탄환 70만 발·총검 2만 정·포탄 3만 발·군도 2천 정·군 차량 200대가 생산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군을 대표하는 무기 공장이기도 했다.
공출되는 쇠붙이 중에서도 범종(梵鐘)은 크기가 상당해서 특히 수난을 많이 받았다. 공출 대상 1호로 가장 먼저 일제 병기창으로 빼앗겨 갔다. 서울 중심가인 종로에 있는 보신각 종도 수탈 대상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일제 앞잡이들은 종로 네거리 종각에 걸려 있는 이 종을 눈독 들였다. 1944년 8월 12일 국민총력경성연맹 회장이란 자가 전체 조선연맹 사무총장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건의서를 보냈다.

‘결전 하에 금속류를 모으는 일이 계속 강화되고 있는 이때에, 일반 대중은 정신(挺身) 협력의 의기를 나타내야 함에도 불구하고, 종로의 보신각 종, 총독부 청사 안의 동상 등이 아직도 그대로 놓여있으니 이게 말이 되는가? 그밖에 서울 시내에 있는 사찰·교회 등에도 여전히 금속류가 많이 남아 있다고 여겨지는 바, 그것들을 바로 공출해야 할 것이다.’

보신각 종은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종은 조선총독부가 1934년 8월 보물로 지정한 문화재였다. 그러니 함부로 공출 대상에 넣을 수는 없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민족의 민심을 크게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보신각 종은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일제 병기창에서 무사히 돌아온 종
절에 있는 범종들은 대부분 일제 병기창에 끌려가 최후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절로 돌아온 범종도 있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갑사의 동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동종은 보물 제478호로, 1584년(선조 17년) 만들어졌다.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제작되었는데, 음통이 없고 용뉴가 두 마리 용으로 되어 있는 등 중국종과 한국종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이 동종이 만들어지기 한 해 전인 1583년에는 북방 오랑캐인 여진족의 대추장 니탕개가 난을 일으켜, 경기도 아래 3도의 큰 종들이 무기를 만들기 위해 모두 공출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584년 동종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갑사 동종이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갑사 동종은 일제강점기에 다른 종들과 마찬가지로 군수물자로 공출되었으나 그 운명이 판이하게 달랐다. 병기창까지 끌려갔다가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고 광복 후에 무사히 갑사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장수의 복을 타고난 종이었다.


운명이 바뀐 동종과 철종
강화도의 전등사 범종은 비슷한 시기에 병기창으로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대신 중국산 철종인 ‘송나라 범종’이 전등사로 왔다고 하니 그 사연이 재미있다. 8·15 광복을 맞이하자, 전등사 주지 스님은 강제로 공출 당한 동종의 안부가 궁금했다. ‘우리 동종이 일제 병기창으로 끌려가서 용광로 속에 들어갔을까? 해방이 되었으니 혹시 녹이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지 않을까?’ 그는 인천 부평의 인천육군조병창을 찾아갔다. 조병창 마당에는 미처 무기로 만들지 못한 쇠붙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주지 스님은 며칠을 뒤졌지만 전등사 동종을 찾지 못했다. 동종은 이미 용광로 속에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대신 낯선 중국산 철종을 하나 찾았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는 ‘중국 북송 소성 4년(1097년) 하남성의 백암산 숭명사에 봉안되었다’고 써있었다. 그러니까 송나라 범종이 중국 땅에서 강제로 공출 당해 바다 건너 인천 부평의 무기 공장으로 온 것이다.
주지 스님은 본래의 동종 대신 이 철종을 가져와 전등사 종으로 삼았다. 이 종이 바로 뒷날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이다. 우리나라 것이 아니고 송나라 때 만들어진 중국 종으로, 재질이 동종이 아니라 철제라는 점이 이채롭다. 높이 1.64미터, 입지름 1미터로 고개 숙인 금강초롱 모양을 한 전형적인 중국종 양식이다. 음통이 없고 용뉴가 두 마리 용으로 되어 있으며 유곽과 종루도 없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도 중국산 철제 범종 3점이 있다. 초대 관장 이경성이 광복 후에 인천육군조병창에서 찾아내어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이다. 중국 원나라·송나라·명나라 때 각각 만들어진 커다란 범종으로, 인천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현재 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