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세계에 알린 민족대표

글 학예실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세계에 알린 민족대표
권병덕(權秉悳, 1868. 4. 25~1943. 7. 13)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권병덕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권병덕은 충북 청주군 미원면 성화동에 위치한 외가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동학 도인이자 천도교 신자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동시에 많은 신도들을 이끌고 항일운동에 앞장선 인물이었다.
동학과 천도교에 입교하여 활동하다
권병덕은 1885년 4월 임규호의 권유로 동학에 입교하였고, 1886년 2월에는 최시형에게 가르침을 받아 청주접주가 되었다. 1894년 동학의 2차 봉기 때 도인(道人) 3만여 명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에게 패퇴하였다. 이후 1906년 1월 김연국과 함께 손병희가 이끌던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단 정비와 교세의 신장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이듬해 12월 김연국과 손병희의 갈등을 계기로 시천교로 옮겨갔다. 관도사(觀道師)·봉도(奉道)의 지위에 올라, 시천교인의 지침서인 『교인필지(敎人必知)』를 저술하였다.
그러나 시천교의 교권 장악을 둘러싼 내부분열이 일어나자, 1916년 이근상·손필규 등과 함께 천도교로 돌아온 그는 이후 장석승례(丈席承禮)·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를 기반으로 점진적인 사회 변화와 민족운동의 역량을 신장하고자 노력하였다.

권병덕 가족사진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식에 참여하다
1918년 말 천도교 내에서는 국외에서 전개된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행정자치 청원→독립청원→독립선언의 순서로 독립운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천도교 인물들은 기독교의 이승훈·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 제작과 민족대표 선정 등에 대해 협의하였다.
1919년 2월 21일 권병덕은 손병희로부터 독립선언 참여 제의를 받고 이에 흔쾌히 찬성했다. 24일부터 26일까지 독립선언서 제작 및 배포하고,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다가온 3월 1일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 직후 피체된 권병덕은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언도받아 1921년 11월 4일 만기 출옥했다. 당시 그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민족의 사랑과 단결을 촉구하였다.


권병덕의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국사편찬위원회)
천도교 통합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노력하다
1921년에서 1922년까지 천도교 내부에서는 개량적 문화운동을 추진하던 구파와 혁신운동을 추진하는 신파 사이에 분쟁이 야기되었다. 권병덕은 구파와 신파의 분쟁을 조정하며 천도교 내 통합을 위해 애썼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를 탈퇴,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했다. 1927년 이후에는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
1930년대 중반 이후 권병덕은 우리 역사를 서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1935년 『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를 간행하였고, 1938년에는 독립운동가들의 의열투쟁의 역사를 담은 『조선총사(朝鮮總史)』를 발간하려다가 소위 출판법에 의해 삭제 처분을 받았다.권병덕은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역사 서술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43년 7월 13일 오후 경성부 신설정 자택에서 향년 76세로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적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선총사(朝鮮總史)』 원고본

천도교의 역사를 정리한 권병덕 자필 원고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