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세계무대에서 독립을 외치다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세계무대에서 독립을 외치다
19세기 말 개항 초기 일본을 방문한 박대양은 서구식 사교장이자 일본 근대화의 상징인 로쿠메이칸(鹿鳴館)에서의 무도회 경험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남녀가 차례가 없고 존비가 없음이 극도에 이르렀으니, 매우 더러워 할만하다.’ 외국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시선도 잠시, 세계는 곧 ‘기회’로 다가왔다.
민영환은 모스크바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해 선진 문물을 견문했고, 홍종우는 조선인 최초로 프랑스 유학을 떠났으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은 세계 여행을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하지만 세계는 결코 낭만적인 의미의 기회로만 작용하지는 않았다. 일제의 침략으로 고국을 떠나야 했던 많은 한인들에게 세계는 ‘생존’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의 근간을 세우다
한인들의 이주는 용정·둔화·훈춘 등 주로 간도지역에 집중됐다. 주로 가족 단위로 이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여러 민족교육기관이 들어섰다. 이상설은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김약연은 명동학교를 세웠다. 특히 대종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면서 서일·김좌진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독립운동단체 중광단(重光團)은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어 청산리대첩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밖에도 대한독립군·대한신민단 등 3·1운동 이후로 독립군단만 50여 개가 만들어졌다.
삼원보·고동하·합니하 등 서간도지역은 주로 신민회에 의해서 개척되었다. 경학사·부민단 같은 자치단체가 형성되기도 했다. 가장 의미 있는 성과는 대규모 독립군 양성을 이끈 독립군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였다. 물론 만주 일대에 만들어진 한인 단체나 독립군 조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서간도지역에만 70여 개의 단체가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1920년 한 해만 해도 국내진공작전·유격전이 1,700여 건, 1921년 602건, 1922년 397건, 1923년 454건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등에서 혁혁한 성과를 일구기도 했다. 특히 1921년부터 상하이 임시정부 내 갈등이 심해지고, 간도참변·자유시참변 등 만주 일대에서의 독립운동이 상당한 위기에 처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록적인 수치가 나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노력이었다.

서전서숙

명동학교(규암 김약연 기념사업회)
망명지 연해주에서 성장한 항일 의병
러시아에서도 많은 한인들이 삶의 터전을 마련해 나갔다. 그중 연해주는 아시아 패권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로, 농업에 뛰어난 한인들의 이용가치가 높았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많은 한인들이 이주할 수 있었고 그만큼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도 급증했다. 1910년 무렵에 약 20만 명, 1917년에 22만5,000명이 극동지역 전체에 거주하였고, 그중 무려 19만 명이 연해주에서 살았으니 실로 어마어마한 이민 행렬이었다.
만주에 비해 연해주는 무기 구매에 유리한 측면이 많았다. 이에 연해주 독립군은 러시아제 5연발총을 소지하는 등 상대적으로 강력한 화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이미 1907년경 의병이 무려 약 4,000명 정도 편성되었고 1908년에는 국내진공작전까지 시도했다. 전제익·안중근·엄인섭·장석회 등은 무산, 경성까지 남하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중근의 개인 고백을 통해서 볼 수 있듯 의병 수준의 조잡함, 통솔 체계의 한계 등으로 인해 초기 활동은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13도의군, 성명회(聲明會) 등을 거치며 연해주 독립운동은 성숙 단계로 접어든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연해주를 대표하는 독립운동단체 권업회(勸業會)가 만들어지고, 우수리스크·하바롭스크·니콜라옙스크·이만 등지에 지회를 설치하면서 효과적으로 한인들을 규합한 것이다. 1913년에는 2,600명, 1914년에는 8,579명까지 회원이 크게 늘어나 이후 권업회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한말 의병 모습
주요 자금처로 활약한 미주의 독립운동
미주(美洲) 지역은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로 대표되는 캘리포니아 그리고 멕시코 일대를 일컫는다. 이곳에는 사탕수수 농장이 널리 분포되어 있고 농장 노동자로 한인들이 이민을 갔던 곳이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지리적 개념은 아니다.
1902년 12월 인천항을 떠난 한인 97명이 하와이에 발을 디뎠다. 1903년부터 1905년 이민이 중단될 때까지 하와이에 7,266명, 멕시코에 1,033명 등 8,000여 명이 미주에 정착했다. 1910년 기준으로 하와이에는 4,000명가량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중 약 4분의1은 귀국, 절반은 미국 본토로 이주하면서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는 물론 콜로라도·네브레스카 등지에도 정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미주 지역에 둥지를 튼 한인은 9,000명에 육박했고, 1945년 광복 당시에는 1만 명 내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미주 지역의 한인들은 당초 약속된 대한제국 정부의 보증과는 다르게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사탕수수 농사를 해야 했다. 더구나 1905년 이후 본국의 보호 자체가 사라지게 되면서 자치기구를 조직해 생존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이에 따라 에오친목회·공립협회 등이 만들어지고 한인합성협회·국민회(國民會) 등을 거쳐 1910년 대한인국민회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대한인국민회는 사실상 준정부조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북미·하와이·만주·시베리아에 지방 총회를 두는 등 산하에 116개의 지방회를 두었다.
대한인국민회를 비롯한 미주의 한인 조직은 독립운동의 주요 자금처였다. 1919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자금은 8만5,000달러였는데 이 중 절반이 임시정부를 위해 쓰였다. 하와이에서 결성된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의 경우 파인애플 농장의 수익금과 지원금을 통해 7만8,642달러를 모으는데, 이 중 2만200달러는 만주 및 연해주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송금했다. 구미위원부의 경우 1920년대 초반 총수입 약 15만 달러의 15% 정도를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위와 같이 독립운동을 벌이는 동안 한인들은 생존을 위해 만주·연해주·미주 등지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만주와 연해주의 경우 한반도와 가까웠기 때문에 주로 활발한 무장투쟁이 이루어졌다. 다만, 연해주는 러시아가 무너지고 공산주의 국가 소련이 들어서면서 항일운동의 성격이 바뀌기도 했다. 이에 반해 미주 지역은 물리적인 제약이 있었기 때문에 직접 투쟁보다는 주로 자금 지원 형태로 활발한 활동이 벌어졌다.


대한인국민회 지방총회 경축행사(1915년, 하와이)
국제사회에서 독립의 목소리를 높이다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 독립의 방략을 둔 고민은 치열하게 이어졌으며 시기와 때에 따라 계속해서 변화·발전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의 바람이 불 때 ‘외교를 통한 독립 방략’이 크게 유행하기도 하였다.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하며 식민지의 독립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이 세계를 강타하면서, 그 결과 국내에서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교활동에 유리한 지역으로 상하이를 선정했으며 강력한 외교독립론자인 이승만을 대통령에 선임하기도 했다. 이후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고, 구미위원부를 세우는 등 미국에서의 외교활동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패전국의 식민지만 해방시키는 등 민족자결주의를 관철시키려는 의지가 없었다. 이에 외교독립론에 의지한 독립활동은 수년을 채 가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독립운동사에 다시 외교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때는 1940년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이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에 승리하기 위해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자국의 이해관계만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냉정한 국제관계의 논리가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에 참가한 김규식(앞줄 오른쪽, 1919년)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단박에 한국사』, 『역사 전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