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숨결
지금은 겨울이야, 강릉

글·사진 임운석 여행작가
지금은 겨울이야, 강릉
겨울 바다는 소슬하다. 여름 바다의 뜨거운 열정과 다른 그 무엇이 그윽한 까닭이다. 김남조 시인은 <겨울 바다>에서 ‘미지(未知)의 새’를 보고자 했으나 ‘보고 싶던 새들은 죽고없었네’라고 했다. 허무한 상념들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 차디찬 바다 앞에 서서 다가올 새날의 희망을 세어보고 싶다. 지금은 겨울 바다가 있는 강릉으로 떠나볼 때다.

겨울바다의 낭만을 즐기기 좋은 경포 해변
정동진 바다 앞에 서서
강릉의 바다는 주문진에서 시작한다.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면 연곡·하평 해변을 지나 사천·순포·순긋·사근진 해변을 거처 경포 해변과 송정 해변까지 연결된다. 강릉항을 지나면서 백사장은 자취를 감춘다. 대신 해안도로와 철로가 동해의 거친 숨소리를 들으며 쉼 없이 질주한다. 그 가운데 “서울 광화문에서 볼 때 정동 쪽에 있다”하여 정동진이라 부르는 정동진역이 있다. 이 역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이다. 1995년에 방영된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음유시인이 읊어주는 듯한 저음의 노랫소리와 가슴을 울리는 클래식의 앙상블은 사랑과 이별, 환희와 슬픔, 희망과 절망의 올무에 걸린 채 살아가는 인생을 닮았다. 더욱이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퍼런 바다를 걷던 주인공의 모습은 처절한 외로움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절망의 깊은 한숨 뒤에 희망의 태양이 떠오를 것을 우리는 믿는다. 겨울 정동진 해변이 매력적인 이유도 그 믿음 때문이다.
해뜨기 전 이른 아침, 정동진 해변에는 여명보다 한발 앞서 도착한 이들이 있다. 망망한 바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그들은 해돋이를 사진에 담기 위해 새벽을 달려온 열혈 사진가들과 새 희망의 축포를 가슴으로 쏘아 올리려는 여행자들이다. 7시가 지나자 날이 밝아온다. 태양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붉은 태양이 온세상을 붉게 물들인다. 시나브로 시간이 흐른다. 선홍색의 태양은 온화한 빛을 발하며 따사롭게 사람들의 얼굴을 비춘다. 연인들은 손을 맞잡은 채 온몸으로 바람을 맞는다. 바람이 드셀수록 남자의 품은 더 넓어진다. 태양은 그들을 축복하듯 더 높이 떠오른다.
소리 없는 언약식을 마친 연인들. 그들의 발걸음이 도착한 곳은 정동진 해변 모래시계공원에 자리한 시계박물관이다. 추운 날씨 탓에 몸 녹일 곳을 찾던 터였다.기차를 개조해 만든 시계박물관에는 시계의 변천사와 동서양의 희귀한 시계 등을 한자리에 전시한다. 여러 전시물 가운데 작은 회중시계 앞에 발걸음이 멈춘다. 타이타닉호 공식 침몰 시각을 알려주는 세계 유일의 회중시계다. 회중시계 내부에는 딸의 행운을 기원하는 문구가새겨져 있다.
사랑하는 나의 딸 노라에게, 리머릭 방문을 기억하며, 펜실베이니아로 돌아가기까지 하나님의 가호와 은총이 함께 하기를.
1912년 4월 11일 사랑하는 엄마로부터.
하나님의 가호였을까? 그녀는 제10호 탈출 보트를타고 무사히 피신했다. 하지만 탈출 보트가 타이타닉호에서 내려지는 순간, 바닷물에 의해 시계가 멈춰 섰다. 바다에 빠진 시계는 완전히 부식되었지만 외형은 금으로 제작되어 보존될 수 있었다.

로스팅한 커피를 맛볼 수 있는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공장
강릉 커피의 진수는 이곳에서
몇 해 전부터 강릉에는 횟집 간판보다 커피숍 간판이 눈에 더 많이 띈다. 언제부터인가 강릉은 우리나라 커피의 성지가 되었는데, 유명한 커피집들이 강릉에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중심에 안목 해변이 있다. 강릉항과 맞닿은 안목 해변은 강릉의 ‘길 카페’로 통한다. 독특한 개성과 맛을 앞세운 지역 커피집과 유명 브랜드 커피숍이 진검승부를 펼치고 있어 취향에 따라 커피를 선택하기 좋다.
2000년대 초반에 문을 연 보헤미안 박이추 커피공장은 강릉 커피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다. 자타가 공인하는 커피 1세대, 박이추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로 로스팅 문화를 보급한 장본인이다. 박이추 선생이 처음 강릉에 문을 연 커피숍이 강릉 영진 해변 앞에 있다. 목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와 금요일~일요일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문을 연다(월~수요일 휴무). 박이추 선생의 커피 맛을 보려면 경포 해변에 위치한 매장을 찾는 편이 좋다. 연중무휴로 저녁 10시까지 문을 연다. 강릉 사천 해변에 자리한 박이추 커피공장도 찾아보자. 이곳 매장은 카페와 로스팅 공장이 연결되어 커피 로스팅 과정을 직접 볼 수 있고 매장 안팎으로 커피 향이 그윽하다.
2002년에 문을 연 테라로사 역시 은은한 커피향으로 입소문 난 곳이다. 전국에 14개 직영 매장을 보유한 테라로사는 원래 커피를 볶아 카페, 호텔, 레스토랑 등에 공급하는 로스팅 공장이었다. 그러다가 소문을 듣고 커피 맛을 보려는 손님들이 늘어나면서 카페를 겸하게 됐다. 요즘은 독특한 인테리어에 브런치, 디너까지 겸하면서 더욱 인기를 얻고 있다. 공장이 있는 본점은 남강릉IC 인근에 있고, 임당과 사천 해변에서도 같은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다.
기왕 커피 향에 취했다면 커피 박물관도 지나칠 수 없다. 이곳에는 인류 최초의 커피인 오스만튀르크의 커피부터 고종황제가 즐겼다는 ‘양탕국’ 커피까지, 커피의 역사는 물론 커피 제조 과정도 살펴볼 수 있다. 수백년 된 로스팅 기계와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고가의 찻잔 등 7천여 점의 소장품 가운데 2백여 점을 순환 전시한다. 특히 야외 온실에서는 커피나무에 열린 커피콩도 확인할 수 있어 좋은 추억이 될 게다.

건축학적으로 의의가 있는 오죽헌 안채
커피 향이 머무는 곳마다 명소 가득
강릉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수도권에서 온 여행자들이다. 2시간 남짓하면 닿을 수 있는 곳인 데다, 명소가 많아서다. 게다가 대부분의 명소가 경포호 주변에 운집해 있으니 이동에도 편리하다. 동선을 따라 ‘경포해변~경포호~참소리 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경포대~허균·허난설헌 생가터~강릉선교장~오죽헌’ 순으로 돌아보면 좋다.
경포 해변은 우리나라 3대 해변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차디찬 바닷바람을 피해 솔숲 길을 걷도록 조성해 놓았다. 비릿한 바닷내음과 솔향이 어우러져 걷기 좋다. 참소리 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은 찬바람에 언듯한 몸을 녹이면서 클래식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설립자 손성목 관장이 소년 시절 선친으로부터 받은 콜롬비아 축음기를 비롯해 한평생 수집한 희귀한 축음기가 전시돼 있다. 특히 에디슨의 3,500여 발명품 가운데 대표적인 축음기, 전구, 영사기 등 2,000여 점의 발명품이 전시된 세계 최대의 에디슨과학박물관이다. 본관 2층 음악 감상실에 가면 큐레이터의 설명과 함께 직접 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경포대에 올라 경포호와 경포 해변을 한눈에 조망하는 것도 권할만하다. 옛 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다음은 허난설헌의 생가터다.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나로 한 많은 삶을 살다간 천재 시인이었다. 강릉에서는 예로부터 백두대간에서 내려온 석간수로 차를 우렸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그 차향을 즐기며 몸을 녹이기에도 그만이다. 선교장은 300여 년 동안 지켜온 한옥의 아름다운 자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뜨끈한 한옥아랫목에 몸을 누인 채 특별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도록 한옥스테이를 운영한다. 우리나라 주택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진 오죽헌은 율곡 이이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오죽헌 안채 대청마루에 앉아 강릉 여행을 되짚어본다. 길지 않은 여정 동안 강릉에 발 도장을 찍었다. 발걸음이 머문 곳마다 혹한을 이기는 사철 푸른 소나무가 있었다. 또 봄을 기약하는 앙상한 자연의 민낯도 마주했다. 인간에게 가장 공평한 것이 있다면 ‘시간’이다. 비록 지금은 생명이 멈춘 듯한 겨울 한가운데 서 있지만, 춥지만 않은 까닭은 2019년에 거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새날을 기약하며 겨울 강릉 여행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