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안창호의 아내가 아니다
이혜련이다

글 임영대 역사작가
안창호의 아내가 아니다
이혜련이다
이혜련(李惠鍊)은 1884년에 안창호와 같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한성부 정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1902년에 안창호와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안창호와 함께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대한인국민회ㆍ부인친애회ㆍ대한여자애국단 등에 참여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69년에 사망했고 2008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운동사에서 발견한 여성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는 대부분은 남성이다. ‘유관순’을 제외한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한 명도 댈 수 없는사람도 많을 터. 그러나 우리 민족의 절반에 가까운 여성들은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을까? 그저 민중 A로 남성들이 가져오는 독립을 기다리기만 했을까? 그렇지 않다. 20세기초는 남성 중심의 시대였으니만큼 여성들이 정치와 군사 전면에 나서 광복군을 이끌거나 임시정부를 지도할 수는 없었지만, 지도자 격 남성들이 독립운동에 집중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여성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이혜련의 아버지는 옛 교육을 대표하는 서당 훈장이었다. 딸에게 신학문을 가르칠 생각이 없었으나 사위였던 안창호의 간청으로 끝내 허락했다. 이혜련은 안창호의 여동생과함께 신학문을 배웠다. 안창호와 결혼한 뒤 곧바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감내하면서 버티던 중 잠시 다녀오겠다던 남편은 고국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신이 힘들다는 것은 아오. 하지만 나라를 빼앗기고 고난을 겪는 동포를 두고 어떻게 나만 편안히 미국에 있겠소? 나는 우리 동포들을 버릴 수 없소.’ 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어요. 도저히 가족 곁으로 돌아오라고 할 수가 없었지요.
남편 안창호가 한국, 중국, 미국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 이혜련은 집을 비운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돌보았다. 혼자서 다섯 자녀를 키워냈을 뿐 아니라 한인 부인단체를 조직해 독립운동 후원을 위한 온갖 활동을 전개했다.
누군가는 해야만 했던 후방 지원
독립운동에 가장 필요한 지원은 돈이다. 임시정부나 광복군, 독립운동가의 개인적인 활동에서 돈은 언제나 필요했다. 안창호는 이 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을 가능케 하는 것은 무엇이요. 곧 무기와 전술이요, 또한 무기와 전술보다도 일층 필요한 것은 무기를 사용할 군자금이외다. 군비가 있고 군인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작전계획이 있나니, 군인 없는 무기를 누가 사용하며, 군자 없는 전술을 무엇으로 활용하리오.
당시 막대한 돈을 안정적으로 모을 수 있는 곳은 미국뿐이었다. 안창호는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서 자금을 모집했으나, 이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야 한다는 현실적 한계에 부딪혔고 중국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주 거주지역인 만주가 일제 침략에 직면하자 임시정부 지원이 어려워졌다.
이혜련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부인들과 함께 성금을 모아 남편에게, 혹은 임시정부에 보냈다. 독립운동가 이갑의 치료비 모금부터 임시정부 정기 후원금,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로는 항일 동지라고 할 수 있는 중국군을 지원하는 모금도 벌였다.
나라와 독립을 위해 앞서 싸우는 사람은 반드시 있어야한다. 어떤 일이든 원하는 만큼 성과를 얻으려면 잠시 시간날 때 힘을 보태는 사람보다 전적으로 투쟁에 전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앞서 투쟁하는 사람이 있다면 뒤에서 돕는 누군가도 있는 법이다. 이혜련은 독립운동가 안창호의 아내로서 남편을 내조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동포들에게 단결을 호소하며 실제적인 지원 활동을 펼쳤다. 이혜련을 비롯한 부인회원들이 모아 보낸 독립자금이 있었던 덕분에 임시정부는 일본을 상대로 갖가지 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
임시정부나 무장투쟁 활동에 참여하는 등 이혜련보다 적극적으로 독립 전선에 뛰어든 여성은 많았다. 그러나 여성 독립운동의 기반 또한 이혜련과 같은 이들이 모은 독립자금이었다.
현재 우리 사회는 선두에서 깃발을 휘날리는 사람만을 주목한다. 뒤에서 이를 지원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기는 풍토가 은연 중에 남아있는 것이다. 단 한 명의 스타를 위해 그 뒤에서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음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