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오늘 세계의 그날
제국의 길, 식민지의 길

글 강응천 기획집단 문사철 대표, 역사저술가
제국의 길, 식민지의 길
1876년 조선은 강화도에서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었다. 흔히 강화도 조약으로 불리는 이 약속의 시작은 이렇다. “조선은 자주국이다” 언뜻 문제가 없는 듯 보이지만 일본의 속내는 달랐다. 이는 조선에 드리워진 청의 간섭을 떼어내기 위한 조약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조선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세계의 운명은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거나, 단 둘뿐인 것처럼 보였다.

강화도 조약 체결 모습
역사를 바꾼 과학 기술
1876년은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발명이 이루어진 해이다. 그해 3월 10일 미국의 발명가 알렉산더 그라함 벨이 역사상 처음으로 전화기를 발명했다. 전기 장치를 통해 사람의 목소리를 먼 곳까지 실어 보내는 획기적인 장치였다. 벨이 전화기에 대고 처음 한 말은 “와트슨 군, 이리 오게. 할 말이 있어”였다고 한다. 천재 토마스 에디슨은 이듬해 소리를 저장했다가 아무 때나 들을 수 있는 축음기를 발명했다. 다시 2년 뒤에는 전기를 이용해 어둠을 밝히는 전등도 만들었다. 독일 의사 로베르트 코흐는 1876년에 동물의 전염병을 유발하는 탄저균을 발견했고, 5년 뒤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탄저균을 퇴치할 수 있는 백신을 발명했다. 코흐는 이후에도 결핵균, 콜레라균 등의 세균을 잇달아 발견하며 1905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에게 분명 축복이었다. 그러나 당시 축복은 소수의 인류에게만 허락됐다. 서유럽에서 시작한 과학기술혁명의 혜택을 세계 모든 인류가 누리기까진 시간이 필요했고,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서유럽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넘어선 자만심을 불어넣었다. 때때로 과학기술은 주변 국가를 착취하고 점령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는데, 서유럽인들은 과학의 발견을 항해와 군사에 적용해 아메리카를 지나 아시아까지 진출했다. 이를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고 한다. 서쪽의 유럽이 동쪽 아시아 각지를 차례로 지배한다는 뜻이다.
일본, 유럽과 같은 꿈을 꾸다
1876년은 사실상 서세동점이 완료된 해였다. 마지막까지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이 마침내 개항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세동점의 측면에서 보자면 조선의 개항은 조금 다르다. 조선을 개항시킨 것은 유럽이 아닌 일본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엘리트 세력은 타이완에 이어 조선을 점령한 자신들을 유럽이라고 생각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탈아입구(脫亞入歐)’란 말로 그 같은 개념을 정립했다. 탈아입구.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1854년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개항 당했다. 에도막부가 매튜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에 맥없이 굴복하고 나라의 문을 열자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분노했다. 그들은 막부와 서양 세력을 한꺼번에 타도하기 위해 일어났다. 그러나 막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오히려 서양의 앞선 과학기술을 받아들이고 산업화의 길로 나아가야 일본의 번영을 기약할 수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근대화 세력은 막부를 몰아내고 천황 중심의 근대화 정책인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일본은 아시아의 후진성을 벗어나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유럽이 그리했듯 식민지를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된 나라가 바로 타이완과 조선이다. 1876년 조선의 개항이 1854년 일본의 개항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데는 바로 이 같은 배경이 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면서도 그렇지 않은, 침략적이고 식민 지배지향적인 나라로 잘못 성장하고 있었다.

일본이 한국에 세운 동양척식주식회사, 영국의 동인도회사를 본떠 만들었다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16세기 말 이래 서세동점의 선두주자는 단연 영국이었다. 일본 역시도 영국을 가장 닮고자 했다. 영국은 1776년 미국이 독립하며 아메리카 대륙을 잃은 뒤에도 지속해서 식민지를 개척하며 마침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했다. 일부 자료에 의하면 대영제국이 세계 중 가장 많은 인명을 살상한 정치 세력이라고 한다. ‘신사의 나라’라는별명과는 매우 동떨어진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대영제국이 제국주의 국가 중 가장 잔인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워낙 오랜 기간 넓은 지역과 많은 인구를 통치하다보니 얻게 된 불명예스러운 수치일 것이다.
1876년 영국은 그동안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 지배를 해오던 인도를 영국 여왕의 통치 아래 두기로 결정했다. 인도는 일부 영국의 인정을 받는 토호들 외에 나라전역이 영국의 직접 지배 아래 들어가 형식적 독립 국가의 지위마저 상실했다. 영국은 식민지 작업을 마무리한뒤 1877년 1월 1일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제국 황제의관을 씌워 주었다. 본국 대영제국에서는 ‘여왕(Queen)’이면서도 식민지에서는 ‘황제(Empress)’라 불리는 희한한 지배자가 탄생한 셈이다. 황제의 지배를 직접 받게 된 인도제국은 오늘날의 인도부터 파키스탄·방글라데시·미얀마 등지까지 엄청난 지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어떤 지역도 한반도보다 작은 곳은 없다. 인도의 운명은 조선의 미래와 다름없었다. 일본은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며 식민 지배의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어디 일본과 청뿐이었을까? 러시아·미국·영국·프랑스 등 어느 한 나라도 경계의 눈을 뗄 수 없었다.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그리고 오스만제국의 선택
조선이 인도와 같은 비극을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이 시기 일부 우국지사들은 일본을 바라보았다. 조선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처럼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고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을 ‘개화파’라 불렀다. 그러나 개화파가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일본과 같은 길을 가려면 반드시 ‘침략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일본은 조선을 침략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의 본색을 꿰뚫어 보지 못한 대가는 1884년 갑신정변에서 뼈아픈 실패로 남고 말았다. 1876년 터키는 조선의 길도, 일본의 길도 아닌 다른 선택을 했다. 그해 12월 3일 터키의 오스만제국이 아시아 최초로 헌법을 공포한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17, 18세기아시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을 호령하던 강대국이었으나, 빠른 과학 기술의 발전을 따라잡지 못하고 19세기 들어서는 서유럽에 밀리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오스만제국이 생각해 낸 자구책이 바로 전제군주국에서 입헌군주국으로의 변화였다. 1876년 오스만제국의 새로운 술탄으로 등극한 압둘 하미드 2세는 벨기에와 프로이센 헌법의 영향을 받은 헌법을 공포했다. 아시아최초의 헌법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앞서 근대화를 이뤘다는 일본도 메이지 유신의 권위 때문에 헌법을 만들 생각은 못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의 헌법은 내각 구성과 상원의원 임명을 술탄의 권한으로 남겨 놓으면서도 하원의원의 선출, 사법부의 독립, 국민의 자유와 공무 담임권 및 피선거권 등은 인정했다. 이런 방법으로라도 국가에 활력을 주지 않으면 서구 열강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 최초 헌법이 몰락하는 오스만제국을 완전히 구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식민지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승전국은 눈엣가시와도 같던 오스만제국에 온갖 제재를 가하며 국제사회에서 고립시켰다. 결국 오스만제국은 몰락했다. 그렇다고 해서 터키가 망한 것은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이무너진 자리에 터키 땅을 차지한 새 주인은 외세가 아닌 터키인에 의해 세워진 터키민주공화국이었다. 오스만제국의 위대한 군인이었던 케말 아타튀르크가 새로운 공화국의 국부(國父)가 되었다. 입헌군주국이 오스만제국을 끝까지 지키지는 못했지만,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이처럼 1876년은 개항과 함께 시작된 수많은 불확실성이 조선이라는 ‘은둔의 국가’에 던져졌다. 어떤 이는 유교의 전통을 고수하며 외세를 물리치자 외쳤고 또 어떤 이는 일본과 같은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876년의 세계정세를 보자면 둘다 정답이라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전통만을 사수하자니 일본과 외세의 힘은 너무 강하고, 일본의 길을 따르자니 올바르지 않음은 물론 조선에게는 너무 늦은 때였다. 터키처럼 입헌군주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가능했을까? 불가능을 이야기하기에는 섣부르지만, 다만 그 후 터키의 역사에 비춰보았을 때 결국은 애국지사와 민(民)이 얼마나 힘을 모을 수 있었느냐가 관건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