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되찾다

여성 독립운동가의<BR />이름을 되찾다
    



글 심옥주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되찾다




우리 독립운동사의 어떤 사건, 또는 날들을 들여다보아도 그곳엔 여성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들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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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여성 독립운동가 차인재의 묘


잃어버린 기억의 흔적을 더듬다

우연한 기회에 미주지역 여성 독립운동가의 흔적과 마주했다. 여러 도시를 방문하면서 연구자도 만나고 후손도 만났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은 공교롭게도 ‘묘지’였다. 생전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묘지, 묘비에는 출생지를 표기한 글귀와 함께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사진이 있었다. ‘본적 조선 경성’, ‘김해 김씨’ 그리고 원적 주소까지.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역사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는 잊은 채로 흘렀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한 이래 1945년 광복을 맞기까지 우리 민족은 독립을 향한 끊임없는저항을 이어왔다. 멀고 먼 타지에서도 독립의 열망이 들끓었다. 죽음의 순간에도 고국을 그리워하며 대한인임을 가슴에 새겼던 수많은 민초 가운데 한국 여성의 잃어버린 역사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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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여자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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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의여학교의 송죽결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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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안성만세, 기생만세운동 참여 기사




여학생, 교사, 상인, 기생, 양반 여성… 만세운동의 주역들

일제를 향한 민초들의 저항은 3·1운동을 기점으로 분출되었다. 3·1운동은 신분과 지역·연령·성별·직업을 뛰어넘는 일치된 민족운동이었다. 일본을 비롯한 만주와 중국 등 국외에서 전초 활동이 시작됐다. 독립선언서가 도화선이 되어 3·1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1918년 11월 「무오독립선언서」와 1919년 2월8일 「2·8 독립선언서」에 이어 1919년 2월에 만들어진 「대한독립여자선언서」에서 여성은 확고한 독립 의지를 드러냈다. 김인종·김숙경·김오경·고순경·김숙원·최영자·박봉희·이정숙에 의해 작성된 연서가 만주, 노령 등 국내외 동포사회에 전달되었다. 「대한독립여자선언서」는 대한민국 부인 동포의 정신 자각을 성명하는 선언으로 일본 침략의 부당함과 국권 침탈의 불합리함을 알리고, 국가위기 속에서 여성의 적극적인 참여와 분발을 호소했다.

1919년 3월 9일 자 『매일신보』에는 「기후(其後)의 소요(逍遙), 평안남도 평양(平壤), 여학생이 만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평양 신양리 미국 사람의집에 여학생 약  200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고, 오후 3시 쯤 일천 명의 군중이 몰려 있는 것을 보병이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1919년 4월 3일 자 신문에는 「경기도 안성(安城), 여기서도 시위, 삼십 일에 또, 기생들도 만세」란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처럼 3·1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여성’이었다. 그들은 지역과 신분의 경계를 넘어서 항일의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턴 부인 등이 조선에 들어와 여성교육기관을 설립했다. 1886년 서울 이화학당을 시작으로 정신여학교 등 조선 곳곳에 여성을 가르치는 학교가 들어서면서 그동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여성교육이 확대되었다. 조선에 학교를 세운 이들은 비록 피부색이 다른 이방인이었으나 ‘제2의 조선인’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우리 민족을 위한 선교와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근대 여성 교육기관까지 설립하였으니 말이다. 근대식 여성교육은 한국여성의 구국의식을 일깨우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1운동에서 여학생은 각 지역 소통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3월 1일부터 4월 8일까지 전개된 여학생 만세시위를 살펴보면 3월 1일에는 보성여학교(선천)·숭의여학교(평양)·루씨여학교(원산)·경성여고보(서울)·정신여학교(서울)에서, 3월 2일부터 11일 사이에는 영생여학교(함흥)·호수돈여학교(개성)·신명여학교(대구)·수피아여학교(광주)·보신여학교(김책)·일신여학교(부산)에서 시위가이루어졌다. 3월 12일부터 4월 8일까지 약 한 달 동안에는 기전여학교(전주)·의신여학교(마산)·영명여학교(공주)·의정여학교(해주)·정명여학교(목표)에서 여학생 시위가 전개되었으니, 전국 방방곡곡 여학생의 나라사랑 행진이 이어진 셈이다.

여학생과 지식인은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비밀회합과 비밀결사대활동을 주도했다. ‘호수돈여학교의 비밀결사대’와 ‘숭의여학교 송죽결사대’가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기생·상인·농민·양반 등 너 나 할 것 없이 여성구국의지는 독립의 열망으로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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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 기념(194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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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화회를 조직한 김마리아

  




대한 여성의 이름으로 독립을 외치다

국권침탈 후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여성구국운동은 지방에서 전국으로 확산, 풀뿌리 운동의 발전된 형태로 뻗어 나갔다. 3·1운동을 기점으로 여성구국운동이 주목받은 것은 사실이나, 이미 그 이전부터 의병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여성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의병장 윤희순과 안사람의병단, 여성국채보상운동은 여성구국의지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환경적 토대가 되었다. 국가와 여성의 관계, 독립의 이유, 자유를 향한 저항…. 그것은 당시 여성이 갈구했던 희망의 메시지였음이 틀림없다.


나라(國家)라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집적(集積)이다. 곧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자유와 권리를 가진연후에 미루어 그 나라의 자유를 보전할 수 있다.

『대한조선독립회 회보』 7호 중


이처럼 여성이 자신의 의지를 피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교육의 영향이 있었다. 또한 해외 유학길에 오른 김란사·김마리아·차경신 등 많은 여성지식인의 도전은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여성애국단체가 조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8년 2월, 광복의 염원을 품은 여학생들이 미국 뉴욕에 모여 무궁화 꽃의 의미를 담은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했다. 김마리아와 황에스더·이선행·우영빈·안헬른 등이 중심이 된 근화회는 대동단결과 재미 한인사회를 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신한민보』에 그 활동이 소개되며 조선 여성의 의기 있는 외침을 일축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여성들은 임시정부의 상징적 의미가 퇴색되지 않도록 남편을 보좌하며 안살림을 꾸렸다. 임정 요인 부인들로 구성된 한국혁명여성동맹과 상해한인애국부인회 등은 자녀교육을 위해 유치원을 설립하여 운영했다. 만주와 간도, 연해주, 중국 일대에서 활약한 여성도 있다. 안경신(광복군 총영)·권기옥(항공사령부)·오희옥(5지대)·정영(2지대)·박차정(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은 알려진 일부에 불과하다. 독립군과 함께한 무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은 훨씬 더 많다. 그들은 무장투쟁의 적지에도 독립운동을 지원, 독립자금을 전달하거나 직접 총과 칼을 들고 일제와 싸웠다.


3·1운동 100년,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되찾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우리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소리 없이 묵묵히 헌신했던 여성 독립운동가 중 얼마나 많은 수가 역사의 기억에 남겨져 있을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힘입어 자유와 독립의 열망을 외쳤던 평화의 메시지는 오늘에야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고 있다. 잊었던 여성 독립운동가, 그 이름을 되찾기 위한 걸음은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