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

밀려드는 서구열강과 무너지는 조선 왕조

밀려드는 서구열강과 무너지는 조선 왕조

 

글 박영규 작가

 

밀려드는 서구 열강과

무너지는 조선 왕조


국난에서 벗어나고자 온 국민이 나섰던 감격의 그 날 1919년 3월 1일. 3·1운동이 어언 100주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를 기념하여 월간 <독립기념관>은 ‘겨레의 함성, 독립의 희망’을 통해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다루고자 한다.


 

서구열강의 침탈과 몰락으로 치닫는 중국

1875년, 일본이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강화도조약을 맺은 이후 조선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동학농민혁명을 거치며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급기야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단행하며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이렇듯 일본이 조선을 식민국으로 만든 35년 동안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제국주의의 선봉에 선 영국은 발칸반도에서 밀려난 오스만투르크(터키)를 압박하며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였을 뿐 아니라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이집트를 차지하는가 하면, 네덜란드와 보어전쟁을 일으켜 아프리카 종단정책을 완성했다. 또한 영국 빅토리아여왕은 인도의 황제를 겸하였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버마(미얀마)까지 장악하며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한편, 북유럽의 최강국 러시아는 남하정책과 동진정책에 박차를 가하여 오스만투르크의 영향력이 약화된 발칸반도에 대한 입김을 강화했고, 중앙아시아의 메르브를 차지했다. 또한 동진을 지속하여 중국의 요동 지역을 차지하는 한편,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과 미국의 후원 아래 성장한 신흥강국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그 기세는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프랑스 또한 이 시기에 침략정책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튀니지를 점유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마다가스카르를 차지하기도 했다, 아시아에 대한 공략도 지속하여 베트남과 라오스를 지배하기까지 이르렀다. 또한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치러 유럽에서의 영향력도 확대해 나갔다. 유럽대륙에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독일은 이를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3국 동맹을 맺었다. 이때 독일 역시 아프리카에서 카메룬과 위투(케냐)를 차지하며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 있었다. 유럽의 제국들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는 동안 미국 역시 이러한 조류에 편승하여 일본과 가쓰라-태프트밀약
을 맺고 필리핀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서구열강은 이렇듯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대한 침략 정책을 강화해가면서 중국에 대한 공략도 지속해 나갔다. 이로 인해 중국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특히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 대륙을 지배하고 있던 청나라의 국가 기강을 뒤흔들었고, 이를 기점으로 황실의 권위는 무너지고 관료 사회는 혼란에 빠졌으며, 민중의 불안은 심화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에 의한 내전이 14년 동안이나 지속되면서 청나라의 혼란상은 극에 달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밀려든 서구열강은 온갖 불평등 조약을 맺어 이권 챙기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로 인해 청나라의 국가 체계는 무너져 관리들의 횡포와 착취가 일상화되었으며, 생존의 기로에 선 민중들은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청나라는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양무운동을 벌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自强)의 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군대의 조직과 무기를 개선하고 서구 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을 확충하였다. 또한 군수공장, 광산과 철도, 전신 시설, 방직 사업 등을 발전시켜 근대화로 나아가려 했다. 하지만 중국의 정치사회제도를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기계 문명만을 받아들이려는 ‘중체서용’의 한계에 부딪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청나라는 쇠락을 거쳐 망국을 향해 치달았다.

 

가쓰라-태프트밀약 : 1905년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밀약. 필리핀과 조선을 미국과 일본이 나누어 지배한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 침략을 위한 국제적인 명분을 획득하였으며 이후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외교권을 침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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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한 일본인을 바라보는 중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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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을 둘러싼 당시의 국제정세를 묘사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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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로 침략한 일본군

 

제국주의의 깃발을 든 일본, 가차 없이 짓밟히는 조선

조선은 순조가 즉위한 이래 헌종과 철종을 거치면서 60여 년 동안 세도정치가 횡행하여 국가 기강은 무너지고 탐관오리가 판을 쳐 백성들의 삶은 한층 피폐하고 곤궁해졌다. 그런 가운데 12살의 어린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아 혁신을 감행한 끝에 세도정치는 사라졌지만, 세계의 흐름에 역행하여 쇄국 일변도의 정책을 구사하는 바람에 변화의 시기를 놓쳤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에 흥선대원군이 밀려나자, 신문명을 받아들여 국가를 혁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개화당으로 불린 이 혁신 세력은 일본의 변화와 발전에 주목했다. 하지만 일본은 개화당의 바람처럼 조선의 혁신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중이었다.
일본은 미국에 강제적인 개항을 당하고 불평등 조약에 따라 문호를 개방했지만, 스스로 메이지유신을 단행하여 시대의 변화에 보조를 맞췄다. 일본은 서양의 기계화된 문물을 수입하고, 고루하고 폐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신문명 중심의 국가 체계를 형성한 덕분에 혁신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역시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고스란히 수입하여 주변의 약소국에 대한 침략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첫 번째 제물은 류큐·타이완·한국 등 약소국들이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의 성공으로 서구화 작업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자, 곧장 류큐와 타이완, 그리고 한국에 대한 정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일본은 류쿠·타이완·한국 순으로 국력이 약한 곳부터 정벌을 감행한 후에 중국 대륙을 정벌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고, 마침내 1874년 5월에 타이완을 기습 공격한다. 이때 일본은 비록 타이완 정벌에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류큐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고무된 일본은 조선 정벌의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운요호사건을 일으킨다.
일본이 불법으로 강화도 해협에 군함 운요호를 진입시키자, 조선은 불법 침입한 운요호에 대한 포격을 가했고, 일본은 이를 빌미로 함선을 동원하여 무력시위를 하며 전쟁 위협을 가했다. 이에 놀란 조선은 결국 일본의 의도대로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여 개항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일본의 도발적인 행위는 미국이 일본을 개항시키기 위해 행한 수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강화도조약 후 조선은 개화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구식군대의 반발로 일어난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다. 이후 청나라의 간섭과 지배가 강화되자, 이를 벗어나기 위한 급진세력의 갑신정변이 발발했다.
하지만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실패하자, 조선은 더 이상의 개혁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10년의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 10년 동안 조선 백성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탐관오리의 횡포는 심화되었으며, 국가 기강은 날로 약화되었다. 결국, 탐관오리의 횡포를 참지 못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되었고, 무능한 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다시 불러들였다. 갑신정변 후 청일 간에 맺어진 톈진조약에 따라 자동으로 개입한 일본군이 조선으로 밀려왔으며, 그것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다. 조선 조정이 이에 반발하여 러시아의 힘을 빌리려 하자, 일본은 조선의 핵심 권력인 명성황후를 시해하였고, 이에 놀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사태가 발발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한편, 국가 조직의 마비 상태로 이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결코 조선 정벌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비호 아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견되는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이 전쟁마저 승리했다. 이후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거침이 없었다.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행정을 장악하고 외교권을 빼앗았으며, 통감정치를 통해 식민화 작업을 가속화했다. 그리고 군대를 해산하고 국권을 강탈하여 조선을 완전히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은 처절한 투쟁을 전개한다.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 치열한 저항을 지속하였고, 안중근에 의해 일본의 실력자 이토 히로부미가 격살되기도 한다. 또한 지식인들은 신민회와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하지만 일본은 막강한 무력으로 조선인들의 저항을 무참히 짓밟으며 결국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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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해협에 진입한 운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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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요호사건을 빌미로 인천에 상륙하는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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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과 텐진조약으로 말미암은 청일 강화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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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공사관의 고종과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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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기가 게양된 근정전

박영규

1996년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내면서 저술활동을 시작하여.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소설가로 등단했다. 문학, 철학, 역사 분야에 걸쳐 저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역사서로는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