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그날
민족의 투사
각시탈의 전설이 되다

글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민족의 투사
각시탈의 전설이 되다
김상옥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1923. 1. 12
매월 대한민국의 광복과 관련된 핵심 사건을 선정하여 그 치열했던 역사의 순간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다시 만난 그날, 첫 번째 이야기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투탄과 최후의
시가전이다. 1923년 1월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대담한 의열투쟁.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각시탈’의 전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성을 발칵 뒤집은 폭탄
쾅! 종로통에서 터져 나온 굉음이 고요하던 경성의 밤하늘을 뒤흔들었다. 놀랍게도 일제 폭압의 상징, 종로경찰서였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붙들려가고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가족들이 고문으로 신음한 그 폭력과 억압의 장소에 폭탄이 날아든 것이다. 폭탄은 창틀에 맞고 앞마당에서 폭발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면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유리창은 박살나고 벽 일부가 무너졌다. 폭발 현장으로 구경꾼들이 삼삼오오 몰려들었다. 넋이 나가있던 순사들은 이내 호각을 불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범인은 어느새 종적을 감췄다.
이튿날 경성 시내에서는 대대적인 검문이 벌어졌다. 감히 시내 한복판에서, 그것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니, 일본 경찰로서는 참을 수 없는 도발이었다. 반면 한국인들은 쉬쉬하면서도 내심 통쾌해했다. 종로경찰서는 독립운동가는 물론 일반인들도 치를 떨 만큼 악명이 높았다. 그런 곳에 폭탄이 터졌으니 쾌거가 아닌가. 소문은 경성을 넘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갔다. 꺼져가던 항일투쟁의 의지가 다시 불타오를 조짐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조선총독부는 긴박하게 움직였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지시로 마루야마 경무국장이 사건 현장으로 급파되었고, 우마노 경찰부장은 직접 수사본부를 지휘하며 범인 검거를 닦달했다. 난다 긴다 하는 고등계 형사와 밀정들이 속속 합류하고, 감시망도 이중삼중으로 가동되었다. 일제의 정보수집과 사찰 활동으로 포위망이 조여들면서 범인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졌다. 종로경찰서에 회심의 폭탄을 던진 주인공은 김상옥이었다.

김상옥

종로경찰서 (1920년대)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관련 기사(1923년 <조선일보>)
실패로 돌아간 조선총독 암살 작전
김상옥은 동대문 일대에서 잘 나가던 ‘영덕철물점’ 사장이었다. 어린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장간에서 일하면서도 교회 야학을 다니면서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오며 20대의 이른 나이에 철물공장을 세워 자수성가했다. 종업원은 수십 명에 달했고, 전국에 거래처를 확보했다. 하지만 1919년 3·1운동은 김상옥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조선 사람들의 독립정신과 저항 의지를 드높이고자 사재를 털어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행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종로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3·1운동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간 후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은 노선 갈등을 겪었다. 그중 김상옥의 선택은 무력투쟁이었다. 종로경찰서와의 악연은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1919년 12월 김상옥이 결성한 암살단은 일제 고위직과 민족반역자를 응징하는 조직이었다. 암살단은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과 손잡고, 경성의 부호들을 접촉해 군자금을 모으는 한편 만주에서 폭탄과 총기를 들여와 거사를 도모하기로 했다. 이윽고 1920년 8월 기회가 왔다. 미국 상하 양원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 것이다.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단체들은 미국 의원단에게 조선 민중의 독립 염원을 알려 인도적인 지원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미국과 일본 사이에는 1905년부터 가쓰라-태프트밀약이 맺어져 있었다. 일본은 미국이 통치하는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고, 미국도 한반도에서 일본의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반면 김상옥과 암살단은 미국 의원단 환영행사를 열 때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일제 고관, 친일 인사들을 암살하려고 했다. 문제는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이었다. 그들은 행사 전날 불령선인들을 대대적으로 연행했다. 김상옥은 도망쳤고 동료들은 잡혀갔으며, 시가전을 방불케 하던 암살계획도 무산되고 말았다.
일제를 몰아낼 유일한 무기, 의열단
더 이상 국내에 머물 수 없게 된 김상옥은 상하이로 건너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에 가입했다. 1919년 11월 중국 지린성에서 결성된 의열단은 정의로운 폭력으로 빼앗긴 나라와 자유를 되찾는 것을 목적에 두었다. 이는 신채호가 쓴 강령 ‘조선혁명선언’에 잘 드러난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암살, 파괴, 폭동 등 끊임없는 폭력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제도를 개조해 인류가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가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은 1920년 제1차 암살파괴계획을 세우고 최신식 폭탄과 무기들을 국내로 밀반입했다. 폭력의 대상은 조선총독·관리·매국노·정탐꾼·적의 시설물 등으로 규정했다. 거사 총지휘를 맡은 곽재기 등이 체포되는 바람에 본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얼마 뒤 박재혁이 부산경찰서, 최수봉이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이를 만회했다. 이듬해에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들어가 폭탄 2개를 투척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식민통치의 심장부를 보란 듯이 습격한 것이다. 1922년 3월엔 독립운동의무대를 상하이로 옮겨 암살 작전을 펼쳤다. 의열단은 일제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김상옥의 차례가 돌아온 것은 그해 11월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합동작전이었다. 임정 재무총장 이시영은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국내에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 등 의열투쟁을 벌여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우고 활동자금을 모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이 작전의 적임자로 김상옥을 지목했다. 그는 화물열차 석탄 더미에 몸을 숨기고 경성으로 잠입했다. 종로경찰서에 던진 폭탄은 날카로운 귀환 인사였던 셈이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

일제에게 두려움을 심어준 의열단
최후의 시가전, 전설이 된 투사
1923년 1월 17일 새벽 5시. 김상옥은 거사를 앞두고 일찍 눈을 떴다. ‘문화정치’라는 미명 아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겉으론 조선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차별을 없앤다면서 뒤로는 경찰을 대대적으로 늘리는 등 감시와 폭압을 강화했다. 이 때문에 친일파, 개량주의자가 득세하고 독립운동은 날로 위축되고 있었다. 김상옥은 저격을 다짐하며 권총을 어루만졌다. 그때 마당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일본 경찰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누이 부부를 불러낸 다음 김상옥의 방으로 다가왔다. 곧이어 고막을 찢는 총소리가 경성의 새벽공기를 갈랐다.
‘17일 오전 5시 경에 경성 시내 00동 모의 집에 무기를 가진 범인이 잠복한 것을 알고 경관 수 명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이르렀다. 범인과 충돌하여 종로서의 다무라 순사는 권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하고 종로서 이마세 경부는 중상, 동대문서 우메다 경부보는 경상을 당하였으며 범인은 현장에서 도주했다.’
<동아일보> 1923년 1월 19일자
일본 경찰은 김상옥의 무예와 사격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몰랐다. 그는 순식간에 체포조를 쓰러뜨리고 눈 쌓인 남산으로 도주했다. 경찰 수백 명이 포위하고 추격전을 펼쳤지만 소용없었다. 그는 산중에서 펄펄 날아다녔고 끝내 포위망을 뚫어 탈출에 성공했다.
스님으로 변장하고 산에서 내려온 김상옥은 동상에 걸린 발을 치료하기 위해 효제동 이혜수의 집에 은신했다. 그러나 서신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은신처가 새어나가고 말았다. 1923년 1월 22일 우마노 경찰부장이 지휘하는 무장경관 400명이 집을 겹겹이 에워쌌다. 김상옥은 벽장에 숨었다가 형사를 사살하고 뛰쳐나갔다. 담을 뛰어넘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며 경찰부대와 시가전을 벌였다. 3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탄환이 떨어지고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그는 동상으로 썩어가는 엄지발가락을 떼어내고 마지막 총탄 1발을 자신의 머리에 겨눴다. “대한독립만세!” 피 끓는 절규와 함께 김상옥은 불굴의 생애를 스스로 거둬들였다. 몸에는 무려 11개의 총상이 나 있었다.

암살단 수령 김상옥 사건 종결 기사(1921년 <조선일보>)

서양화가 구본웅의 효제동 격전 시화

김상옥 의사가 사용한 7연발 권총 모델

김상옥 장례식 관련 기사(1923년 <동아일보>)

마로니에공원에 위치한 김상옥 의사 동상
김상옥의 신출귀몰한 활약은 만화와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각시탈>의 모티프가 되었다. 2016년 개봉한 영화 <밀정>의 강렬한 도입부 장면 역시 김상옥의 최후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것이다. 오늘날 종로4가 효제초등학교 앞길은 ‘김상옥로’라고 이름 붙었다. 영화와도 같은 삶을 살았던 영웅 김상옥. 그의 존재는 우리 가슴에 먹먹하게 이어지고 있다.
권경률
역사칼럼니스트.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칼럼 ‘사극 속 역사인물’을 연재하고 팟캐스트 ‘역사채널 권경률’을 진행한다. 저서로는 <조선을 새롭게 하라>, <조선을 만든 위험한 말들> 등을 출간했으며, 영상물 <시시콜콜 한국사 어워즈>도 선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