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찾은 오늘

좌절은 실패가 아니다
포기가 곧 실패다

좌절은 실패가 아니다<BR />포기가 곧 실패다

글 이성주 역사칼럼니스트 

 

좌절은 실패가 아니다
포기가 곧 실패다

 


1907년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보낸다. 경술국치 직전 국제사회에 조선의 목소리로, 조선의 주장을

내뱉으려 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이 시도는 무산되고 만다. 헤이그 특사 사건과 등치되는 ‘기억’으로 우리에게는 이준(李儁)이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이상설은 헤이그에 이준 열사와 함께한 특사 정도로만 남아 있지만, 그는 국운(國運)이 기울던 시기 일제에 항거해

독립운동의 초석을 남긴 인물이다.


 

실패로 쌓아올린 기억들

▲독립운동가 이상설 ▲1870년 충북 진천군 출생 ▲1894년 조선 마지막 과거에 급제 ▲1905년 을사늑약 당시 고종에게 ‘망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림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 ▲1910년 13도의군을 편성, 고종의 망명을 시도했으나 실패 ▲연해주와 간도 등의 한인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 조직 ▲1914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 광복군정부를 만듦 ▲1917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이상설은 1894년 25세의 나이로 조선의 마지막 과거시험인 갑오문과에 급제하여 출사를 했지만, 나라는 이미 망국(亡國)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온몸으로 막아서며, 고종에게 다섯 차례나 상소를 올렸다. 전제왕조 국가에서 임금에게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극언(極言)을 할 정도로 결기에 넘쳤다. 실제로 이상설은 이후 국권회복운동에 나서자는 연설을 한 뒤 땅에 머리를 찧어 자결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후 헤이그 특사로서 네덜란드로 향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자회견을 하는 게 고작이었다.
1910년에는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함께 연해주 방면에서 의병을 규합 ‘13도의군’을 편성하고 고종의 망명을 시도했지만, 실패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연해주와 간도에 있던 한인들을 규합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독립의 결의를 담은 취지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미국·러시아·청나라 등에 일본의 침략 만행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보냈다. 이에 반발한 일본은 러시아에 성명회 주요 인물들의 체포를 요구하였고, 이상설을 비롯한 13도의군 42명이 체포되었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해 권업회 의장으로 있으면서 <권업신문>을 발간, 반일투쟁을 위한 경제력 배양에 힘썼다. 이를 통해 1914년 경술국치 이후 최초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가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설은 순국했다. 그의 인생은 계속된 시도와
실패 사이의 어딘가에 있었다.

 

포기하면 실패조차 없다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이 숨을 거두기 전 남긴 말이다. 유언대로 그의 유해와 문고는 모두 불 속으로 사라졌다. 연부역강(年富力强)한 48세 나이로, 채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리타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진 이상설. 그의 인생을 되짚어 보는 이유는 우리에게 보여준 ‘울림’ 때문이다. 구한말의 격동기에 조선의 마지막 과거 급제자로 세상에 나온 이상설은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끊임없이 몸을 던졌다. 일본의 야욕이 한반도 전체에 뻗어가는 것을 막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이상설은 계속해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개인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힘을 내 목소리를 높였다. 고종이 망명을 시도했던 부분이나, 3·1 운동 이전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운 대목만 봐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저항했는지 알 수 있다. 이건 일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운명’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그는 계속 실패했고, 그럼에도 또 다시 일어났다.
이상설의 삶 전반에는 분명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대목이 있다. 경제위기와 청년실업, 북핵 위기 등등 우리를 둘러싼 환경 중 어느 하나 녹록치 않은 것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세상은 우울감에 가득 찬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희망보다는 절망을, 도전보다는 포기를 말한다. 어차피 안 될 걸 알기에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은 과연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저 무조건 노력해야 한다는 고답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자신이 진정 목표로 하는 한 가지를 위해 몇 번이고 세상과 부딪히기를 망설이지 않는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18세기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 볼테르는 “인간은 무엇인가 되고자 하는 순간 자유가 된다”고 말했다. 1914년 그날, 대한민국의 독립을 그 누가 쉬이 생각했을까. 암담한 세상 가운데 이상설은 끊임없이 독립을 위해 몸을 던지고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독립을 향한 열망 속에서 자유를 찾은 과정이 아니었을까.


이성주

시나리오 작가 겸 역사칼럼니스트. 대중과 함께 호흡하는 글쓰기를 목표로 <조선의 민낯>, <왕들의 부부싸움>과 같은 역사서를 출간한 바 있다. 최근에는 국제정치와 관련된 연구 및 집필에 열중하고 있다. <전쟁으로 보는 국제정치> 시리즈 1, 2, 3권을 출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