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한국인 징용자들을 희생시킨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글 신현배 역사칼럼리스트
한국인 징용자들을 희생시킨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은 일제의 군수물자 보급을 위해 여러 곳으로 징용되었다. 우키시마호를 타고 시모키타반도로 끌려간 이들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광복을 맞아 부산항으로
돌아오던 그들은 그리웠던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억울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일제가 남겨놓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한국인 징용자를 싣고 돌아오던 우키시마호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 일본 북동쪽에 있는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오미나토항구에서는 4,730톤급의 배 한 척이 출항했다. 일본 해군 소속 군함인 우키시마호였다.
우키시마호는 원래 1937년 만들어진 오사카 상선 소속의 화물선으로 오키나와 항로나 태평양 항로를 주로 운항하던 중 태평양 전쟁을 앞둔 1941년 군에 징발되어 군용선으로 이용되었다. 우키시마호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되었던 한국인 노동자 수천 명과 그 가족, 그리고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이 타고 있었다. 일본의 패전으로 광복을 맞이하자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몸을 실은 것이다.
이들이 끌려갔던 곳은 시모키타반도였다. 이곳은 해협이 산기슭까지 들어와 절벽을 이룬 산악 지대로, 군사적 요충지였다. 오미나토 해군 본부는 이곳에 비행기 활주로와 격납고·지하 탄약저장고·항만 및 방공호를 건설했다. 이후 미군의 일본 본토 공격에 맞서기 위해 시모키타반도를 군수기지사령부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외부 지원 없이 석 달 동안 적의 공격에 버틸 만한 무기·탄약·식량·의약품 등의 군수 물자를 전국에서 거둬들였다. 군수 물자의 안전한 수송과 보관을 위해서는 철도·터널·부두·비행장 건설 공사가 시급했는데, 이에 수많은 한국인 징용자들이 동원되었다.
그러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일제는 한국인 징용자들을 강제 송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사흘 뒤인 8월 18일, 오미나토 해군 본부는 한국인 징용자들과 그 가족을 우키시마호에 태워 부산으로 출항했다. 오미나토에서 부산까지는 1,574㎞로 시속 22㎞로 가면 사흘쯤 걸리는 거리였다. 부산을 향해 나아가던 우키시마호는 8월 24일 오후 5시쯤 방향을 바꿔 일본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다 마이즈루 앞바다로 들어왔다. 그리고 해안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이르러 멈춰 섰고, “쾅! 쾅! 쾅!” 하는 갑작스러운 폭발음과 함께 침몰했다. 이때가 8월 24일 오후 5시 20분쯤이었다.

강제징용자 승선 장면

한국인 강제징용자의 철도 노동 모습
우키시마호 침몰 이면에 밝혀지지 못한 진실
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9월 1일, 우키시마호의 도리우리 함장은 사건의 경위를 밝혔다. “한국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실어 나르던 우키시마호가 사고를 당해, 한국인 노동자 3,725명 가운데 524명, 일본인 승무원 255명 가운데 25명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망자 수는 정확한 것이 아니었다. 승선 명부가 아니라 미리 신청받은 사람들의 숫자였기 때문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명부에 이름을 올리지 않고 그냥 승선한 사람이 무려 5,000여 명이나 되고, 사망자 수도 발표와는 달리 수천 명에 달했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의 원인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미군이 바다에 설치한 기뢰(바다 지뢰)에 닿아 배가 폭발, 침몰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다. 우키시마호는 완전히 멈춰 서 있을 때 폭발했기 때문이다. 또 목격자들에 따르면 기뢰에 의한 폭발일 경우에는 물기둥이 50~60m 쯤 치솟는데, 사건 현장에서는 물기둥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헤엄을 쳐서 육지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미군이 기뢰를 설치할 이유가 없고, 배가 폭발하기 10분 전에 일본 해군 병사 300여 명이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고 하여 일본 정부의 주장은 신빙성을 잃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우키시마호 침몰 원인을 ‘자폭설’로 보고 있다. 즉 일본 해군이 배에 폭탄을 설치하여 이를 침몰시켰다는 것이다. 우키시마호의 출항을 앞두고 승무원인 일본 해군 병사들은 한국으로 가는 것을 몹시 꺼려하고 두려워했다고 한다. 부산에 갔다가 한국인 징용자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 해군 병사들은 배를 폭파해 한국인 징용자들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우키시마호가 오미나토항을 출발할 무렵, 일본 해군 병사들이 갑판 위에 모여 있었는데 그때 해군 중위 한 사람이 갑자기 “일본군이 배 안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소리치며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한다. 또한 배의 폭발 소리도 ‘자폭설’이 진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배의 폭발 소리가 “쾅! 쾅! 쾅!” 세 번이나 크게 들렸는데,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쾅!” 하고 한 번으로 그쳤을 것이다.
1945년 8월 22일 오후 7시 20분 오미나토 해군 본부는 우키시마호 함장에게 비밀문서를 보냈다. 그 문서에는 ‘지금 출항하는 배 말고는 운항을 금하라. 폭발물을 처리하라’고 적혀 있었다. 2016년 발견된 일본군부의 이 문서는 우키시마로 침몰 사건을 고의로 일으켰다는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리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