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회와 <자반고등어찜>
글 _ 황인철 산부인과 과장진료과목 _ 산전관리, 고위험임신, 정밀초음파
45년 전 봄날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놀고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고, 형형색색의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엄마의 꼬드김에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하지만 엄격한 규율과 학급 친구와의 어색함, 뒤바뀐 환경에 입학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등교만 하려면 이불에서 나오기가 싫어지고, 어떻게든 늦게 가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버리는 시위 아닌 시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학교 가기 싫은 소년을 끌어낸 이벤트 ‘운동회’
그러던 5월의 어느 날, 한 줄기 빛과 같은 이벤트가 생겼으니 바로 학교 운동회가 열린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그것이었다. 운동회 준비한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운동장에서 달리기도 하고, 오재미(콩을 천으로 만든 보자기에 넣고 던져서 박을 깨는 놀이)에 피구, 그리고 줄다리기까지... 소년은 운동회 날짜만 손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드디어 운동회 전날, 소년은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가서 운동복과 운동모자를 고르고 한 달 전부터 봐두었던 새하얀 신상 운동화까지 한 아름 사왔다. 돌이켜보니 반세기 남짓 살아온 인생에 가장 좋았던 날이 그때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뜨끈뜨끈한 왕만두까지 먹고 든든한 아랫배를 두드리면서 소년은 아직 운동회 개회식도 열리지 않았지만 이미 경기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씩씩하게 귀가하는 찰나,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불안한 마음에 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일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예보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치지 않는 빗소리에 뒤치락거리며 잠을 설치다 보니 어느덧 이튿날이 밝아온다.
소년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눈을 뜨고 창문 밖을 내다보니 장대비가 쏟아진다. 현관 앞에 놓아두었던 새 운동화는 이미 비에 젖어 눅눅해졌다. 비가 무슨 대수냐며 운동회 할 수 있다고 악을 쓰며 울었지만, 그날 학교는 아예 휴교를 했다. 운동회가 없어진 것이다. 소년은 얼마나 슬펐는지 젖은 운동화를 안고 마당에서 비를 맞으면서 집에 들어올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엄마도 달래는 것이 지쳤는지 나와 보지도 않는다.
사라진 운동회,
소년을 위로해 준 것은 ‘엄마표 고등어찜'
한참 시간이 지났을까, 엄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들아, 아침밥 먹자.”
물에 빠진 생쥐처럼 마당에 널브러져 있던 소년은 아침밥이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비릿하면서도 고소한 생선 냄새가 풍겨온다. 그리고 밀려오는 허기짐과 꼬르륵 소리.
슬픔을 한순간에 날려버린 것은 바로 고등어찜이었다. 매콤하고 비릿한 냄새의 조화가 한 달간 기다렸던 운동회가 취소되어 상심한 소년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추억의 음식 고등어찜을 오늘 아침 반찬으로 만들어 본다. 만드는 요리사와 주방은 달라졌지만, 그 맛은 예나 지금이나 나의 심장을 울리는 악마의 유혹이다. 달라진 것이 하나 더 있다. 소년 대신에 우리집 고양이가 아까부터 계속 울어대고 있다. 고등어의 유혹이 이 녀석에게도 잘 전달된 것 같다.
재료
고등어자반 1마리, 양파 1개, 대파 반 뿌리, 고춧가루 한 스푼
소스
조선간장 50cc, 냉수 50cc, 다진 마늘 한 스푼, 홍고추, 청양고추, 쪽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