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곧은 충절과 절의가 깃든
경상북도 영주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볼에 스치는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지만, 오히려 좋다.
차분하고 한적한 풍경, 호호 불며 먹는 따뜻한 먹거리, 여기에 눈까지 내리면 겨울 여행의 낭만은 배가 된다.
올겨울 추천 여행지는 소백산 자락에 자리한 경상북도 영주다.
선비의 고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유교 문화뿐만 아니라 나라 사랑을 엿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장소가 가득하다.
부석사 무량수전(좌), 부석사 조사당(우)
고대 사찰 건축의 미(美), 부석사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곳으로,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역사유적으로서 특별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국보 5점·보물 6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점을 보유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사찰이다. 특히 유명한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무량수전은 목조 건물로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담고 있는 법당이다. 이 건물은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주심포 양식과 배흘림기둥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목조 건물은 대체로 무게가 있는 거대한 지붕 때문에 그 자체로 위엄있어 보이지만, 반면에 다소 갑갑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 그러나 부석사의 무량수전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곡선 모양의 불룩한 배흘림기둥 덕분에 가뿐하고 경쾌한 느낌을 준다. 더불어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가운데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바라보는 풍경 또한 압권인데, 소백산맥의 산봉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모습은 아름다움을 넘어 장엄함까지 느끼게 한다. 어떻게 이런 멋진 풍광을 찾아냈는지, 이곳을 창건한 의상대사의 안목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Tip 1. 신비한 설화가 깃든 부석사의 창건 설화
『송고승전(宋高僧傳)』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부석사의 창건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 후 신라로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했다고 한다. 의상이 절을 지으려 하자 도적떼가 방해했는데, 이때 용이 된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해 그 무리를 위협해 달아냈다. 마침내 의상대사는 무사히 절을 짓게 되었고, 이후 의상대사는 선묘를 기리기 위해 절의 이름을 ‘부석(浮石)’이라 지었다.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서는 부석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고, 선묘를 기리는 건물인 선묘각이 있다. 이 설화 속 의상대사를 향한 선묘의 마음을, 나라를 지키고자 한 호국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부석사 주소 & 문의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 054-633-3464
금성대군 신단(좌), 금성대군 신단(우)
충절과 절의의 상징, 금성대군 신단
부석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나라에서 편액을 내려 공인한 서원이다. 그 옆에 문화체험을 할 수 있는 선비촌과 소수서원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소수박물관이 있다. 더불어 충절을 상징하는 공간도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바로 금성대군 신단(神壇)이다. 신단이라고 하면 ‘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이곳은 ‘금성대군이 신이 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불리게 된 사연은 역사 속 비극과 관련이 있다.
과거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단종의 작은아버지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은 1453년 10월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亂)을 일으켰다. 이 정변으로 수양대군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고 단종을 이름뿐인 상왕(上王)으로 삼았으며, 곧이어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하여 영월로 유배까지 보냈다. 이에 단종을 지지하던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은 순흥도호부(현 영주 지역)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후 1457년 금성대군은 순흥의 여러 선비와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추진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그리고 이 지역의 선비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당시 순흥도호부 백성들은 금성대군의 충절을 높이 받들어, 그를 기리고 제사를 지낼 단을 쌓았다. 또한 금성대군을 신령처럼 모셔 이 제단에 신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금성대군은 영주 지역민들에게 정신적 지주이자 화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 밖에도 오늘날 민속문화제의 일환으로 성대하게 거행되고 있는 ‘두레골 성황제’는 영주 지역민들이 금성대군을 신격화한 또 하나의 사례라 할 수 있다.
Tip 2. 피가 흐르다 멈춘 곳, 피끝마을
1457년 금성대군의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인근 백성들까지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이때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십여 리를 흐르다 영주시 동천면에서 멈추었다는데, 그리하여 동천면은 피끝마을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순흥도호부(현 영주지역)는 폐부되어 풍기군과 영천군 그리고 봉화군으로 분할되는 사건을 겪게 되었고, 인근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금성대군 신단 주소 & 문의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 054-634-3310
대한광복단 추모탑(좌), 대한광복단기념관(우)
독립정신과 업적의 재조명, 대한광복단기념공원
영주에는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가 있다. 바로 풍기읍에 자리한 대한광복단기념공원이다. 이 공원은 1913년 풍기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 대한광복단(풍기광복단)의 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으로,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현충시설이다. 대한광복단은 의병 출신 독립운동가들과 계몽운동가, 영남 지역의 유림 등 여러 계층이 참여하였던 비밀결사 조직으로, 군자금 모금·민족반역자 응징·일제관헌 습격·친일부호 총살 등의 항쟁을 벌였다.
이 공원의 중심에는 성채를 닮은 전시관이 있는데, 제1전시관에서는 민족독립운동과 의열투쟁·경술국치와 무단통치 등, 제2·3전시관에서는 대한광복단, 제4전시관에서는 영주시의 독립운동사 등을 전시하고 있다. 마지막 제5전시관에서는 선열과 함께하는 사진 체험을 할 수 있다. 이 전시관을 차근차근 둘러보면 조금이나마 대한광복단이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에 나선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번 호에 소개한 부석사와 금성대군 신단 또한 처한 상황이 다를 뿐 모두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깃든 소중한 장소이다.
Tip 3. 대한광복단을 주도한 채기중의 업적
대한광복단을 주도한 채기중은 80여 명의 모험용사대를 조직해 만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구입하여 전국에 출몰하면서 부호의 금고를 털어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또한 채기중은 강병수와 함께 군자금 탈취를 계획하고 강원도 영월군 상동의 일본인이 경영하는 중석광에 광부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친일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수합의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후 대한광복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와 합류하여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경상도의 거물 친일파인 장승원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대한광복회 조직이 발각되어 채기중·박상진 등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1921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대한광복단기념공원 주소 & 문의
경북 영주시 풍기읍 산법리 산85-13 | 054-635-3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