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12월호
끝나지 않은 독립운동

하와이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를 기리며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근래 독립운동계에서 주목받는 이슈는 여성독립운동가이다. 일제강점기에 여성들은 전근대적인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근대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고, 

사회활동이나 독립적인 경제생활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그런 만큼 여성독립운동가는 남성보다 그 수가 매우 적다. 

이러한 제한적인 상황에서도 여성들은 3·1운동과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광복군에서 남편과 뜻을 같이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도 미주에서 활동한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도 ‘사진 신부(picture bride)’들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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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로 건너간 ‘사진 신부’들 (1910년대)

121년 전, 하와이로 간 한인들

정부로부터 미주지역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여성은 2023년 11월 현재 55명이다. 1995년에 박원신(건국훈장 애족장)과 강혜원(건국훈장 애국장)이 처음 포상받은 이후 1997년 2명, 1998년 1명, 2002년 2명, 2008년 1명 등으로 가뭄에 콩 나듯이 하다가, 2014년부터는 매년 이어졌고 적게는 2명, 많게는 11명(2022년)에 달하였다. 그 가운데 23명은 1902년 12월 이후 하와이 이민을 간 노동자들이거나 그 자제들, 미국 유학생, 국내 혹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다 망명한 이들이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32명은 ‘사진 신부’로 보이는데, 58.2%로 절반을 훨씬 넘는다.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들을 언급하기 전에 하와이 이민 과정을 간략히 살펴보려 한다. 

지금으로부터 121년 전, 이맘때인 1902년 12월 22일 오후 2시 우리나라 첫 이민자 121명이 겐카이마루(玄海丸) 일본 선박을 이용하여 인천항을 출발하였다. 이 배는 목포와 부산을 거쳐 이틀 후인 12월 24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정박했다. 신체검사를 통과한 한인 101명(남성 55명, 여성 21명, 아동 25명)만이 12월 29일 미국 상선 갤릭(Gaelic)호로 옮겨 타 이듬해인 1903년 1월 13일 이른 오전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들이 한인 최초의 공식 이민자로 기록되었다. 

이후 1905년 8월 8일 몽골리아호가 호놀룰루에 도착한 것을 끝으로 모두 65편의 여객선이 오갔고, 그 인원은 7,400여 명에 달했다. 이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고용되었다. 하와이 이민이 중단된 것은 을사늑약 이후 한국을 반식민지로 만들었던 일제가 한인 노동력을 통제하려는 이유도 있었고, 미국 내 한인 증가로 인한 일본인 세력의 위축을 우려한 측면도 있었다. 

하와이 이민자 7,400여 명 가운데 성인 남성은 6,300여 명, 여성은 640여 명, 아동은 550여 명이었다. 남편을 따라온 기혼 여성이 420여 명인 반면에 남성 기혼자가 2,800여 명이었기에 대부분 남성은 가족을 고향에 두고 왔거나 미혼자들이었다. 미혼자들은 남녀 모두 20~30대로서 79.98%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여성 미혼자들은 대개 부모나 친척을 따라온 경우이다. 그 결과 여러 사회문제가 발생하였다. 독신자 남성이 과반이 넘었기에 도박과 폭행 사건들이 빈번하였고, 무엇보다도 결혼 적령기 남성들 문제도 컸다. 당시 남녀 비율이 10대 1로 매우 불균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독신 한인 남성들이 하와이 현지에서 타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모색된 것이 ‘사진 신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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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이민선 갤릭호(좌),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들(우)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한 ‘사진 신부’들

이와 관련하여 ‘사진 신부’가 이뤄지는 과정부터 살펴보자. 한인 이민이 이뤄지기 전인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인 노동자들이 미 대륙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는데, 이와 함께 중국인 성매매 여성의 숫자도 많아졌다. 결국 1882년 미국 연방법 최초로 ‘중국인 차별법(Chinese Exclusion Law)’이 제정되었다. 이후 중국인 노동자의 유입이 중단되었고, 일본인 노동자가 그 자리를 메꿨다. 그런데 이들은 노동 이민이 아닌 미국 내에 정착하려고 하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부당한 노동 여건을 파업으로 해결하려고 하였고, 농장주들은 이에 따라 골머리를 앓았다. 또한 미국 본토로 건너간 일본인들이 노동시장을 잠식하여 백인 노동자들로부터 반일 여론도 크게 일었다. 결국 미 정부는 일본인 대신 한인 노동자로 대체하는 한편, 1907년 3월에는 ‘행정명령’으로 일본인의 이민을 제한하였다. 

이후 1908년 일본은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인도적 차원의 가족 입국만큼은 허용한다는 단서 조항을 얻어냈다. 이때 일본 남성의 독신자를 위해 고안한 것이 ‘사진 신부’였다. 사진으로만 ‘맞선’을 본 뒤 마음에 들면 혼인신고를 하고 하와이로 입국하는 형식이었다. 1910년 8월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 한인 여성도 같은 방법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인 여성의 ‘사진 신부’는 1910년 11월부터 ‘일본인 배척법’에 의해 중단되는 1924년 10월까지 모두 1,056명이 미국으로 이주해 갔다. 이들은 대개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으로 수동적으로 결혼을 위해 도미(渡美)하기도 했지만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향을 내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일제의 식민지를 벗어나 새로운 기회를 얻기 위한 의지도 강했고, 도미하여 학업을 이어가려는 욕구도 컸다. 

그런데 ‘사진 신부’는 중매쟁이를 통해 하와이의 신랑감과 사진, 서신을 교환하는 것으로만 결혼 여부를 결정해야 했기에 무모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더욱이 남자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처를 얻고자 나이를 속이거나 사진을 조작하는 게 다반사였기에 막상 건너온 ‘사진 신부’들은 막다른 현실에 망연자실하기도 하였다. 신부와의 나이 차가 많은 경우도 적지 않았고 신랑의 경제적 여건은 열악하였으며, 일부는 남편의 구타와 학대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특히, 신부들과 달리 신랑이 무학력자가 많아 문제가 되자, 현지 발행 신문인 『신한민보』는 한인 남성들에게 자신의 여건 및 자격과 맞는 여성과 결혼할 것을 충고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여러 병폐가 있었지만, ‘사진 신부’와 더불어 고국에 남겨두고 온 부인들과 자녀들이 하와이로 건너가면서 여성들의 숫자가 늘어나 심한 불균형을 보였던 남녀 비율이 점차 개선되었다. 가정을 일군 여성들은 고달픈 여건 속에서도 자녀들을 낳고 그들을 교육하는가 하면 농장 노동자로서 안정된 삶을 위해 노력하였다. 더욱이 이들은 조국의 현실을 안타깝게 여겨 독립을 위해 여성단체의 일원으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국내에서 일제의 식민지인으로 살았던 경험이 있었기에 배일 의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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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신부’ 강희근의 일본제국 해외여권 (1917.2.7.)(좌),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 김차순(가운데)과 일행(우)

이국땅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꿈꾼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 32명은 강메불·곽명숙·김공도·김덕세·김도연·김복순·김석은·김성례·김영도·김자혜·김차순·문또라·박경애·박금우·박보광·박신애·박정경·박정금·박혜경·박인숙·승정한·심영신·이정송·이제현·이묘옥·이선희·이영옥·이함나·이희경·전수산·천연희·황혜수 등이다(가나다 순). 이들은 하와이로 건너오는 시기가 각기 달라 나이를 판가름하기 어렵지만, 1915년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25.3세(생년미상 8명 제외)였다. 나이대가 10대 중반부터 40대 초중반에 걸쳐 있는 것을 보면, 과부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전체 ‘사진 신부’ 1,056명 가운데 극히 일부이지만, 고단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서로 격려하고 상호부조를 하는 한편, 빼앗긴 조국 독립을 위해 독립금과 의연금을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단체에 힘을 보탰다. 또한 이들은 식민지 조국의 각종 재난에도 구제금을 보냈으며, 태평양전쟁 중에는 미국에서 발행된 전시공채를 구입하거나, 전쟁으로 희생된 한인들을 위한 구제 활동까지도 벌였다. 

그 가운데 강메불[임정수]·김도연[윤응호]·김석은[김홍균]·김성례[이암]·김자혜[김은해]·박정경[박충섭]·승정한[승용환]·이정송[안원규]·이제현[양주은]·이함나[민의식]·이희경[권도인]·한덕세[김형순] 등 12쌍은 부부 독립운동가이다([ ]은 남편 이름). 그런데 통상 부부 독립운동가라면 여성은 남편보다 서훈을 늦게 받거나 훈격이 낮은 데 비하여, 김자혜·이함나·강메불·김성례 등은 남편보다 먼저 서훈을 받거나 같이 받았다. 또한 나머지 20여 명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이 얼마큼 주도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진 신부’ 여성독립운동가를 비롯하여 미주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분들과 관련하여 주목하지 않은 점이 있다. 공훈록이나 신문 등에 이들의 이름이 서양식에 따라 남편 성을 따라 기록된 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가 뒤섞여 있다. 이는 단지 제도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본래 그들의 성으로 바꿔야 한다. 여성독립운동가 중에서 남편의 이름이 확인된 38명 가운데, 본래 자신의 성으로 기록된 것은 강혜원[김성권]·공백순[배의환]·김낙희[백일규]·김노디[손00]·김대순[양희용]·김도연[윤응호]·김정성[차정석]·박금우[정시준]·박영숙[한시대]·심영신[조문칠]·이혜련[안창호]·이희경[권도인]·임배세[김경]·전수산[이동빈]·차보석[황사선]·차인재[임치호]·천연희 등 17명 정도이다([ ]은 남편 이름). 이런 경우에 ‘이명’에 남편 성을 딴 이름이 들어가 있지만, 나머지 21명은 ‘이명’란에 본인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다. 아울러 확인되지 않은 분의 경우도 남편을 찾아서 비워 둔 ‘이명’란을 채워야 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해야 할 최소의 예우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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