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12월호
이달의 독립운동가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부부 독립운동가
문일민·안혜순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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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독립운동을 함께 하다

일제강점기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 민족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들은 온 가족이 함께 나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중에는 부자(父子), 형제(兄弟)뿐 아니라 부부(夫婦)가 독립운동에 나선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독립운동이 전개되는 곳에서 함께 투쟁하거나 독립운동에 나선 남편을 보좌해 부인이 생계를 유지하고 활동을 뒷받침하는 등 역할을 분담하며 부부이자 동지로서 활약했다. 문일민 가족의 경우, 남편인 문일민은 1920년에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성공시킨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오가며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아내 안혜순은 문일민을 도와 힘든 집안 살림을 꾸리며 생계를 이어 나가는 방식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활동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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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독립운동」, 『독립신문』 (1920.2.17.)_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제공

평남도청 투탄 의거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의정원에서 활동한 문일민

문일민은 1894년 12월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나 1906년 함일학교(咸一學校)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같은 해 7월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곧이어 대한청년단연합회(大韓靑年團聯合會)에 가입해 별동대 대원으로 활동하던 중 1920년 8월 3일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국내 특공대로 평양으로 잠입, 평남도청 투탄 의거를 성공시켰다. 1924년 중국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에 입학했고, 1925년 2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평안남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이후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등에 참여해 군사 관련 활동을 전개했으며 1930년에는 흥사단에 가입했다.

그는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이후에도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았고 피난 과정에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 적극적인 의정활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도착한 후에는 1943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부 총무과장, 이듬해 10월 참모부 참모로 임명되어 활동하던 그는 광복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했다. 1947년 10월 미군정청 앞에서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할복 의거를 단행하기도 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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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 폭탄사건」 『매일신보』 (1920.8.19.)_국립중앙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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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난강무학교 동학록(雲南講武學校 同學錄)에 실린 문일민의 모습(좌), 대한민국 제34회 임시의정원 의원 기념 사진 (1942.10.25.)(우)

살림을 꾸리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안혜순

안혜순은 1903년 1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찍이 중국으로 이주했고 1928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문일민과 결혼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 머물렀다. 1932년 윤봉길의 상하이 의거 준비 과정에서 안혜순은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의 요청에 따라 의거에 사용될 빈 도시락을 준비했다고 전해진다. 안혜순은 1935년 2월 상하이 한인애국부인회의 정기총회를 주도했고 이듬해 12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뢰로 각종 기념일에 필요한 기념 전단을 인쇄하고 배부하는 일을 수행했다. 안혜순은 겉으로 드러난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남편 문일민을 보좌하기 위해 상하이, 충칭에 머물며 힘겨운 망명생활을 묵묵히 이겨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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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민과 두 아들 (1930)(좌), 장년 시절의 안혜순국가보훈부 제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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