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11월호
이달의 독립운동가

학생들의 독립운동
서상교·최낙철·신기철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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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독립운동의 주체로 나서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탄압에 맞서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등 주요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다. 학생들은 동맹휴학에 나서거나 항일비밀결사 결성 등을 통해 일제의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에도 맞섰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자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항일투쟁을 이어나갔다. 대표적으로 대구상업학교의 태극단·대구사범학교의 연구회·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가 있으며, 서상교·최낙철·신기철은 학생비밀결사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른 인물이다.


서상교와 대구상업학교 태극단

서상교는 1923년 11월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남산소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상업학교에 재학하던 중 1942년 5월 항일비밀결사 태극단(太極團)을 조직했다. 결성 직후 1년여간 비밀리에 단원을 모집, 이듬해 4월 태극단의 조직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서상교는 체육국장으로 선임되었다. 태극단의 단원은 26명으로 대부분 대구상업학교 학생으로 구성되었고 5월 9일 결단식을 개최하며 전국적인 조직망 수립을 통한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그러나 밀고로 인해 1943년 5월 23일 단장이 붙잡히고 곧이어 서상교를 포함한 단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서상교는 당시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1944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단기 5년 이상 장기 7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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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도부 시절의 서상교 (1941)_서보혁·서보현 제공(좌), 출옥 후 서상교의 모습 (1945)_서보혁·서보현 제공(우)

최낙철과 대구사범학교 연구회

최낙철은 1921년 11월 전북 무주에서 태어났고 대구사범학교 5학년에 재학 중 1941년 1월 항일비밀결사 연구회(硏究會)를 조직했다. 연구회는 사범학교의 교과목 중심으로 14부를 편성했고 최낙철이 지리부 책임을 맡았다. 연구회 결성 이후 회원들은 연구성과를 공유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고 졸업 후에는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힘쓰기로 결의했다. 최낙철은 졸업 후 함북 나진의 약초공립국민학교에 부임해 교사로 재직 중 대구사범학교의 항일비밀결사 활동이 적발되면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그는 광복을 맞아 출옥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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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1940.1.)(좌), 대구사범학교사건 예심종결서(우)

신기철과 춘천고등보통학교의 상록회

신기철은 1922년 1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춘천고등보통학교에 재학했다. 1937년 3월 학생비밀결사 상록회(常綠會)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간부급 회원들의 졸업을 앞두고 1938년 2월 새로운 임원진이 구성되었는데, 신기철은 동료의 권유로 입회해 서적계 책임을 맡았다. 새로운 회원 가입을 위해 활동하던 신기철은 같은해 10월에는 회장직을 겸임했고 학교에서 벌어지는 민족 차별대우를 논의하는 회의를 주도하기도 했다. 

1938년, 상록회의 활동이 드러나면서 관련자 137명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고 그 중 신기철을 포함한 36명이 검찰에 송치됐다. 신기철은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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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철의 수형기록카드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좌), 「상록회사건 예심조서」 (1938)_국사편찬위원회 제공(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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