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부(正義府),
한인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다
글 박환(역사학자, 고려학술문화재단 이사장)
1924년 11월 24일, 중국 동북지역에서 정의부가 조직되었다.
정의부는 이주 한인사회를 총괄하며 자치·군사·교육·언론 등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고, 1920년대 중·후반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정의부 선서문, 『독립신문』 (1925.1.1.)
정의부의 조직과 목적
정의부는 1924년 11월 24일 중국 동북지역인 만주의 화뎬현(樺甸縣)에서 성립된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이다. 참의부·신민부 등과 함께 3부로 일컬어지며, 1920년대 중·후반 만주지역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중심인물은 이상룡·김동삼·오동진·지청천·김창환·정이형 등이다. 특히 정의부는 입법·사법·행정의 3권 분립 체제를 갖춘 준정부적 조직으로서 헌법에 준하는 헌장도 제정하여 주목된다. 하얼빈 이남의 40여 개의 현에 거주하는 한인을 기반으로 자치행정을 실시하는 한편, 의용군을 편성하여 항일무장투쟁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정의부의 중앙조직을 상세히 살펴보면, 행정기관은 중앙행정위원회였고 사법기관은 중앙심판원이었다. 그리고 이 조직표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관할 각 지역에서 선출한 약 30명으로 구성된 입법기관인 중앙의회가 있었다. 중앙행정위원회에는 민사·군사·법무·학무·재무·교통·생계·외무 등 8개 부서를 두었다. 아울러 각 부서와는 별도로 독립군을 총괄할 사령부를 조직하여 이를 통해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효율적으로 한인사회를 운영하고 지원하기 위해 관할 각 지역에 지방조직을 설치하였다. 즉 한인 가구 1,000호를 한 단위로 묶어 총관구를 설치하고, 그 밑에 500호로 지방, 100호로 백가장, 50호로 구, 10호로 십가장을 설치하였다. 이들 각 지방 조직에도 중앙에서와 마찬가지의 입법·사법·행정의 업무가 행해질 수 있는 지방행정위원회나 의회·사판소(심판원이 후에 사판소로 명칭이 바뀜) 등이 설치되었다.
류허현 거리
자치활동으로 이상적 농촌건설을 추진하다
정의부는 양기탁·손정도 등을 중심으로 ‘이상적 농촌건설’을 기획하였다. 이 계획은 그 규모가 엄청났던 만큼 자본금이 많이 필요했지만, 그를 조성하지 못해 실행까지는 가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의부의 산업 활동은 이 계획을 기본으로 현실에 맞게 꾸준히 추진되었다.
즉 1925년 3월 정의부는 공농제(公農制) 실시 규정을 발표하였다. 공농제는 공농수익금을 조성해 농구를 구입하여 한인들에게 대여해 주는 한편, 남은 금액은 싼 이자의 농업자금으로 대출해 준다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1925년 「농촌공회통칙(農村公會通則)」이 마련되면서 보다 효율성을 가지며 한인들의 경제적 안정에 이바지하였다.
군사활동
정의부는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생도를 양성할 일, 군사국내진입전의 경우 정의부 소속 독립군들은 진입대 규모가 총 10명이든 20명이든 간에 2~3명으로 한 조를 짜, 소규모의 여러 조가 분산되어 국내에 진입하도록 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 파견대의 총규모는 총사령부에서만 알 수 있었고, 같이 파견되는 같은 조들도 전체규모는 알지 못하고 출발하였다. 이들 각 조는 국내에 들어와 사령부에서 지시받은 날짜와 장소대로 도착하면 다른 조들과 합류가 될 수 있는 그런 체제였다. 이는 어느 조가 일제의 감시망에 발각되어 피체되더라도 그 조만 피해를 입는 데 그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정의부의 만주 내 무장활동은 모험대 또는 암살대라는 명칭의 전투부대와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한 모연대, 그리고 관할지역 한인사회의 자위를 목적으로 한 보안대 등이 편성되어 이루어졌다. 모험대(암살대)와 모연대는 의용군으로 편성한 부대였으나, 보안대는 의용군이 아닌 각 지역의 청장년이 그 지역의 안위를 위해 편성한 지역대였다.
교육활동
정의부가 펼친 또 하나의 주요한 사업으로는 교육활동을 들 수 있다. 정의부는 우리 민족이 식민지하에서 고통받고 끼니를 해결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러한 상황을 이기고 더 나은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때문에 교육의 목적을 단순히 문맹퇴치 또는 인성의 함양에 그칠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개척하는 실용적인 재산으로 습득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인식에 의해 정의부는 교육의 단계와 구분을 보통·직업·사범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보통교육을 다시 단계적으로 소학·중학·여자중학으로 구분하였다. 직업교육은 농업·공업·상업으로 분류되었고, 사범교육은 교원을 양성하기 위한 최상급의 학교였다.
『전우』 3호 일부 (1927년 7월 1일자)
언론활동
정의부가 펼친 또 하나의 주요한 사업은 언론활동이다. 정의부는 중앙조직 또는 각 지방조직에서 펼친 주요사업을 각 관할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또는 국내와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전개한 독립운동 사실을 한인들에게 알려 독립정신을 고무시키기 위해 신문·잡지 등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언론매체로는 관보 성격의 『정의부공보』와 『중앙통신』, 『대동민보』, 『신화민보』 등의 신문과 잡지인 『전우』가 있었다. 이 중 중국어로 간행한 『신화민보』는 중국인들에게 배포되었다.
『대동민보』의 창간호는 1926년 9월 15일자로 발간되기 시작하였으며, 신문지 4절형 크기의 8면이었다. 편집주간은 박범조[일명 김종범]였다. 창간사에서 창간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① 적의 정책과 죄악의 이면을 폭로한다, ② 민중의 교양지로 한다, ③ 우리 혁명운동의 통일에 노력한다.
『전우』는 정의부가 발행한 월간잡지이다. 1927년 1월 1일에 창간되었고, 정의부 중앙조직의 간부인 김이대·박범조·김탁 등이 책임사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창간사에서는 “인류는 유사 이래 지금까지 투쟁으로 일관해 오고 있는데, 그 목적은 투쟁 없는 진정한 자유평등의 신(新)사회를 건설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여 현재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불평등하고 부자유적인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우리 민족 모두가 혁명전선에 나아가 투쟁하는 혁명 전사가 되자고 주장하였다. 최근 하버드대학 엔칭도서관이 보관 중인 1927년 7월 1일자 110면 정도 분량의 3호 전문이 박환 교수에 의해 공개되기도 하였다.
정의부의 해체와 국민부로의 발전
남만주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자치활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펼치던 정의부는 1927년 초부터 독립운동계에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에 동참해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하지만 만주의 통일운동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1929년 4월 남만주 지역을 중심 근거로 한 국민부, 1928년 12월 북만주 지역을 중심근거지로 한 한국독립당으로 양분되었다. 이에 정의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각자의 노선에 따라 이들 두 단체에 나뉘어 가입함으로써, 정의부는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