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우리 문화재 보호’ 역시
독립운동이었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반포일이 9월 상순(10일)이라는 게 밝혀졌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이 지금의 한글날로 정해졌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매입하여 광복 때까지 소중히 간직한 전형필(1906~1962)의 공이 크다.
‘해례본’이란 한글이 어떤 원리를 바탕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한 책을 일컫는다. 이 책자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한글 창제에 대한 여러 억측이 난무했다.
일제강점기에는 한글이 한국 고유의 창살 문양에서 유래되어 창제되었다는 설이 회자하였는데,
이후 한글이 계통적·독립적인 동시에 당시 최고 수준의 언어학·음성학적 지식과 철학적인 이론에 의해 창제된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를 기회로 일제강점기에 한국 문화재 보호와 수집에 모든 것을 바친 전형필의 업적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전형필
한글날이 10월 9일인 이유는?
‘한글날’이 처음으로 정해진 것은 1926년 조선어연구회(현 한글학회)가 훈민정음 반포 여덟 회갑(480년)을 기념하여 음력 9월 29일(양력 11월 4일)을 ‘가갸날’(1928년 한글날로 개칭)로 정하면서 비롯되었다. 1446년(세종 28년) 음력 9월 29일 기록에 9월 중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는 사실에 따른 것이다. 그 뒤 1930년대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로 정했다가 다시 10월 28일로 수정했다.
그런데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우연히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한글날이 새롭게 정해졌다. 1945년 광복 후 처음 맞이한 한글날에는 해례본 서문에 9월 상순에 이를 완성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한글 반포일을 ‘음력 9월 10일’이라 못 박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에 행사가 치러진 이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암흑시대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민족 문화재를지키는 것이다
전형필을 소개할 때 ‘문화 독립운동가’라 칭한다. 일제강점기에 그가 우리 문화재는 곧 민족의 자존심이라며 거의 모든 재산으로 이를 사들이고 지키는 데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6년 서울 종로구 광장시장 일대에서 태어났는데, 1929년 24세 때 아버지로부터 800만 평(약 26㎢)의 땅을 상속받아 한국의 40대 부자가 됐다. 전형필의 집안은 증조 때부터 배오개(지금의 종로4가) 중심의 종로 일대 상권을 장악한 10만 석 대부호 가문이었다.
그가 한국 문화재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휘문고보 재학 중 스승이자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민족주의자였던 고희동(1886~1965)의 영향이 컸다. 그는 전형필에게 암흑시대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민족 문화재를 지키는 것이라는 깊은 뜻을 알려줬다. 전형필은 1928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 재학 중 방학을 이용하여 귀국했을 때, 고희동의 소개로 오세창(1864~1953)을 만난 뒤로 다시금 민족문화 수호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오세창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여, 3년여의 옥고를 치른 후 칩거하면서 서예가·전각가(篆刻家)·서예학과 금석학 역사가로 활동했다.
그에게 ‘간송(澗松)’이란 호를 지어준 것도 오세창이었다. 한겨울에도 얼지 않고 흐르는 물과 그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란 뜻이다. 오세창으로부터 서화 골동품의 감식안을 키운 전형필은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뒤 1934년 서울 성북동의 땅 1만여 평을 사들였다. 우리 문화재를 간직하고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오세창은 그곳이 ‘옛 선잠단지 북쪽에 있는 땅’이라는 이유에서 북단장(北壇莊)이라 이름을 지어주었다. 전형필은 이를 터전 삼아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나섰다. 청일전쟁 이후부터 일본인들은 우리의 온갖 문화재들을 마구 도굴·약탈하였다.
이는 일본에 반출되어 일본인 수집가들과 권력층·재벌가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대표적 사례로 1907년 1월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한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가 ‘개성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제86호)을 불법적으로 실어 냈다가 여론의 비난으로 1918년 11월 다시 돌려준 것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많은 우리 문화재가 일본에 반출되었고 일본 각처의 박물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오구라 컬렉션’이다. 이는 오구라가 일제강점기에 수집한 유물 5천여 점 가운데 일본에 반출된 천여 점가량을 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형필은 당시 아시아 최대 고미술 유통업체인 야마나카 상회(山中商會) 측과 경매 입찰 경쟁을 벌였다. 야마나카 상회는 1923~1936년 사이 수십 차례 전람회를 열어 많은 한국 문화재를 빼돌리고는 이를 뉴욕·런던·파리·베이징 등지의 점포를 통해 팔아치웠다. 1934년 이에 가슴 아파하던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가 가지고 있던 혜원 신윤복의 ‘풍속도 화첩 30점’(국보 제135호)을 서울의 8칸짜리 고급 한옥 25채 가격인 2만 5,000원에 매입했다. 1936년에는 ‘청화백자양간진사철채연국초충문병’(국보 제294호)이 경매에 나왔는데, 이를 두고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와 경쟁하였다. 서로 간에 자존심 싸움에 가격은 치솟아 애초 6천 원으로 시작하여 1만4,580원까지 올랐고 끝내 전형필이 이를 낙찰 받았다.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_우측에서 네번째가 전형필, 다섯번째가 오세창이다.
민족문화의 보존을 통해 민족의 긍지를 되찾다
이외에도 전형필은 적지 않은 한국 문화재를 사들였다. 1935년 일본인에게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국보 68호)을 2만 원에 매입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에 있던 영국인 존 개스비가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그가 모았던 고려청자 전부를 경매에 부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전형필은 서둘러 낙찰가 40만 원을 준비하고자 충남 공주에 있던 5천 석지기 땅을 처분하였고 어렵게 ‘청자 상감 포도동자문 매병’ 등 도자기 20점을 40만 원에 매입했다. 또한 그는 일본으로 반출될 뻔한 ‘괴산 팔각당형 부도’를 가까스로 되샀으나 이내 조선총독부에 압수당하자 3년간의 반환청구 소송 끝에 1938년 이를 되찾기도 하였다. 특히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3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을 손에 넣었다. 그는 조선총독부가 이를 알까봐 극도의 비밀에 부쳤다가 광복 후에야 이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무엇보다도 『훈민정음 해례본』을 먼저 챙겨 피난을 떠났고, 피난 중에 낮에는 품어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며 정성으로 이를 지켰다.
이렇듯 그가 수집한 유물은 국보 12점, 보물 10점 등 1만 6,000여 점에 달한다. 그는 한국 문화재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민족정신’이라 여겼고, ‘독립운동’을 한다는 마음으로 이를 사들여 보존하였다. 그는 1938년 7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 정책이 시작될 무렵 수집품을 관리·전시하고자 서울 성북구에 개인미술관을 세웠다. 이름은 ‘빛나는 보물을 모아둔 집’이란 뜻의 ‘보화각’(현재 간송미술관)이라 지었다. 이곳은 민족문화의 보존을 통해 민족의 긍지를 되찾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우리 문화를 건설하기 위한 초석이었다.
민족 문화재의 참다운 수호자였던 ‘전형필’
그의 업적을 기려 ‘문화 독립운동가’라고 칭하고 있지만, 국가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아니다. 1962년 서훈 심사가 본격화된 뒤로 기준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기본적으로 수형 기간·활동 기간을 이 주효한 판단 기준이었던 점은 변함없었고 사건이나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 혹은 주요 간부·의병으로 전사 또는 피살된 분, 친일파와 일제 원흉 제거 활동을 벌인 분, 글로써 민족의식을 일깨운 분, 독립지사를 무료로 변호한 법조인 등에 대상이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서훈이 정례화하면서 사회주의자를 포함하거나 옥고 기간을 낮추는 등 기준이 이전보다 폭이 넓어졌고, 독립운동의 계열별로 보면 의병·3.1운동·문화운동·국내항일·의열투쟁·학생운동·만주와 노령 방면·임시정부와 중국 방면·광복군·애국계몽운동·미주 방면·일본 방면·외국인 등으로 세분화하였지만, 그는 빠져있다.
그가 평생 많은 재산을 들여 우리의 문화재를 지켜냈지만, 이러한 그의 활동은 독립유공자 서훈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 문화예술계 인사의 공적이 좁게 해석되고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된 결과이다. 2023년 9월 현재 문화 활동으로 분류된 독립유공자는 103명(1.58%)에 불과한데 그마저도 ‘옥고(獄苦)’와 ‘단체 활동 여부’가 이를 판가름하였다. 민족문화 보존에 힘쓴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나 일제로부터 문화재를 지켜낸 전형필의 경우는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사후에 대한민국 문화포장(1962)·문화훈장 동백장(1964)·금관문화훈장(2014) 등이 추서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여러 신문과 방송 매체에서 전형필을 소개할 때 빠지지 않는 것 중의 하나가 ‘독립운동가’라는 타이틀이다.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소개할 때도 그의 이름은 포함되곤 한다. 그에 관한 학술 논문에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은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문화재의 일본 유출 저지에 앞장서서 매우 귀중한 민족문화 유산들을 수집하여 보존한 보기 드문 유형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일본인 권력자와 결탁하거나 일부 골동 상인들처럼 자신의 부나 안목을 자랑하기보다는 오로지 민족혼을 지킨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막대한 사재를 다 털어 넣은 민족 문화재의 참다운 수호자였다.”라고 기술될 정도이지만, 그는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미래 지향적이고 다양한 서훈 기준을 마련해 유공자 발굴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전형필은 엄연한 독립운동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