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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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의
결성과 활동

 

글 김광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922년 10월 28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샤페이로 바오캉리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김구·여운형·이유필·손정도 등에 의해 한국노병회가 창립되었다. 

이들의 목표는 장차 독립전쟁을 내다보면서 여기에 필요한 군사와 자금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운 구체적인 목표는 10년 안에 1만 명 넘는 노병을 길러내고, 100만원이라는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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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병회 회헌, 부 회칙 급 취지서 (1922)

독립운동이 장기화되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3·1운동에서 표출된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를 결집시켜 이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해 가을 국내 한성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통합하여 출범한 임시정부는 교통국과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 대한 통치를 시도하고 만주의 독립군 단체들을 지휘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임시정부의 정책들은 재정적 뒷받침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계획 자체로 그치거나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임시정부의 재정 확보는 주로 연통제와 교통국을 통한 독립자금의 송달 및 인구세, 독립공채 발행과 미주지역 교포들의 성금에 의존하고 있었다. 재정 확보의 주요 루트인 연통제와 교통국의 조직이 일제에 의해 와해됨으로써 임시정부의 재정적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한편 파리강화회의와 워싱턴 태평양회의 및 극동민족대회 등 몇 차례에 걸친 외교적 노력도 모두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별다른 소득 없이 좌절감만 안겨주었다. 게다가 임시정부 중심의 독립운동진영에 이념적 분화와 노선 갈등이 초래되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세력의 외교방략의 한계와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따라 임시정부 내외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이 본격화되면서 독립운동진영은 격렬한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극복책의 하나로 한국노병회가 결성되었다. 


한국노병회가 결성되다

1922년 10월 28일 상하이 프랑스조계 샤페이로 바오캉리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김구·여운형·이유필·손정도 등에 의해 한국노병회(이하 노병회)가 창립되었다. 노병회의 목표는 장차 독립전쟁을 내다보면서 여기에 필요한 군사와 자금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내세운 구체적인 목표는 10년 안에 1만 명 넘는 노병을 길러내고, 100만원이라는 전쟁비용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병은 소련의 노병과는 다르다. 소련에서는 노동자와 병사의 대표 모임이라는 뜻이지만, 노병회의 경우는 한 사람이 노동자이면서 또한 병사라는 말이다. 노병회의 노병은 전통시대의 병농일치제와 오히려 가까운 개념이다. 독립운동에 뜻을 둔 청년들이 군사학교를 다녀 군인으로 성장하고, 또한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생계를 꾸려가다가 장래 전쟁이 일어날 경우 독립군을 구성하고 국내로 공격해 들어간다는 것이 노병회가 세운 계획이다. 

대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이유 체제가 형성됨에 따라 당장 전쟁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머지않아 일제의 도발로 다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그럴 때 독립전쟁을 펼친다는 것이 이들이 내세운 논리의 출발이었다. 노병회는 당장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중국과 연합하여 독립군이 동삼성에 집결하여 조선으로 진출한다는 목표를 세워 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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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병회 설립 장소 (바오캉리 24호, 조상섭 집 자리)(좌), 김구(우)

군사 인재를 양성하다

노병회는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사관자격을 양성할 일, 군사서적을 간행하여 군사지식을 계발할 일, 외국의 군대, 군사학교 및 병공창 등에 소개하여 이에 관한 지식을 수득(修得)케할 일 등을 제시하고 추진하였다. 먼저 중국 군사기관으로 청년을 보내 장교로 육성하는 작업을 펼쳤다. 또 무기 생산공장인 병공창으로도 사람을 보내 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1922년 10월 말 김홍서와 조상섭이 중국의 유력 군벌 가운데 하나였던 펑위샹(馮玉祥)에게 파견되었다. 장차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한인 청년의 군사교육을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1923년 초에는 김홍서가 중국 군벌 우페이푸(吳佩孚)의 뤄양 병영을 방문하여 한인 군대 양성을 위한 문제를 협의하였다. 일찍이 난징에 유학하여 중국어에 능했던 김홍서는 한중 합작 교섭에 적임자였다. 친한파 군벌 우페이푸는 중국군이 한국을 거쳐 일본에 진공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반일적이었는데, 이러한 측면에서 노병회와 우페이푸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교섭 노력이 성과를 거두어 중국 군사교육기관에 한인들을 보내 교육시키게 되었다. 1922년 12월 이동건·김세쟁·성준용 등이 직예성의 한단군사강습소에 파견되어 군사교육을 받았다. 같은 시기 백운서는 베이징 학생단, 주문원과 윤원장은 카이펑 병공국에 파견되어 군사기술을 익혔다. 중국 군사교육기관에 파견된 한인 청년들은 단순한 노병의 요원이 아니라 군사간부요원으로 양성되게 되었다.

또한 노병회는 여러 곳에 지부를 설치하고 전비를 모금하였다. 1923년 회원 모집을 위해 북간도에 제1반, 노령에 제2반을 파견하였다. 이유필이 이끈 제1반은 북간도에서 통상회원 120명에 입회금 1,200원, 특별회원 177명에 입회금 354원, 기부금 1,950원을 모집하였다. 남형우가 이끈 제2반은 노령에서 통상회원 140명에 입회금 1,400원, 특별회원 180명에 입회금 360원, 기부금 1,250원을 거두는 성과를 올렸다. 

노병회는 1923년 4월 제1차 정기총회에서 군사교육에 필요한 다양한 군사서적을 간행하여 보급하는 사업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이를 통해 그때까지 통일되지 못한 각지 독립군의 군기와 군율을 통일하고자 하였다. 이 일은 노병회에서 군사교육 관련업무를 담당하는 교육부장 윤기섭이 맡아서 추진하였는데 한글로 된 『보병조전』이라는 군사훈련교범을 편찬하였다. 보병조전은 노병회의 군사교육에 활용되었으며 1930년대 한인 군사교육에도 교재로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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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서(좌), 『보병조전』 초안 표지 (1924.05.22.)(우)

광복군의 밑거름이 되다

노병회가 10개년의 사업계획을 제시하고 출범했으나, 그 추진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놓여 있었다. 당초 노병회가 설정한 노병 1만명 양성, 1백만원의 전비를 조성한다는 목표는 객관적인 상황에서 볼 때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초대 이사장이었던 김구가 1925년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이유필이 그 뒤를 이었지만, 독립운동계에 밀어닥친 전반적인 어려움으로 말미암아 목표 달성은 너무나 먼 일이 되었다. 더구나 전쟁비용을 저축해 두었던 은행이 파산하는 바람에 그마저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노병회는 창립 당초의 약속대로 10년이 지난 1932년 10월 해체를 선언하였다. 

비록 처음 내세운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해도 노병회의 활동은 1930년대 중반부터 한국인을 위한 군사훈련기관이 중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부설되고 그 결과 상당수의 독립군을 양성할 수 있게 되는 기초가 되었다. 더 나아가 이때 양성된 군사 인재들이 1940년 독립전쟁 방략을 전개하기 위해 창설된 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의 기틀을 이루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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