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8주년을 맞아
‘광복절’을 되새기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1946년 8월 15일, 이날은 광복 1주년을 맞이한 날이었다. 당시는 ‘광복절’이 아닌 ‘해방기념일’이었다.
이는 1946년 5월 미군정청이 해방기념일뿐만 아니라 신정일(1.1), 독립기념일(3.1), 추석(음력 8.15), 한글날(음력 10.9), 개천절(음력 10.3), 기독성탄일(12.25) 등을 정식 공휴일로 지정하면서다.
처음 맞은 기념일에 기념식과 음악회가 개최되었고 서울 시내 가장행렬이 진행되었으며 죄수들 가운데 모범수들이 가석방되었다. 지금까지 가석방은 '특별사면'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
이날 화두는 38선을 기준으로 남북이 분단된 상황이었고, 미군정의 통치를 받던 때였기에 ‘민족통일’과 ‘자주독립’이었다.
1948년과 1949년 8월 15일에 내걸린 경축 현수막 글귀는 ‘해방기념일’이 아니었다.
1948년 이날은 해방기념일과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이 겹쳤기에 ‘대한민국정부수립국민축하식’이었고, 1949년은 ‘대한민국독립1주년기념’이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8월 15일이 ‘광복절’로 바뀌어 기념하게 되었고, 지금껏 그날을 어떤 날로 기념해 오고 있는지를 되새겨보고자 한다.
1946년 8월 15일, 서울 중앙청에서 열린 해방 1주년 기념식 (당시는 ‘광복절’이 아닌 ‘해방기념일’이었다.)
1950년대, 국경일 제정·광복 10주년 등
‘광복절’이 국경일로 제정된 것은 1949년 10월 1일 대한민국 정부가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다. 이로써 3·1절, 제헌절, 개천절, 한글날과 함께 광복절이 대한민국 5대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이후 정부는 국경일 경축 가사를 현상 모집하였으나, 입상작품이 없어 전문가에게 위촉하여 1950년 4월 정인보 작사, 윤용하 작곡의 광복절 노래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기념식은 치러지지 못했다. 광복절 첫 기념식은 1951년 8월 15일 임시수도 부산에 마련된 경남도청 내 국회의사당에서 개최되었다.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에 ‘남북통일과 완전한 자주독립’을 쟁취하자는 목소리가 컸다.
1952년부터 1955년까지는 중앙청 광장에서 광복절 경축을 겸하여 이승만 대통령취임을 축하하는 기념식이 치러졌다. 경축사에 ‘광복절을 계기로 통일로 진군하자’는 등의 ‘북진통일’이 강조되었다. 1954년 처음으로 경회루에서 경축연이 열렸고 1961년부터 매년 그곳에서 행사가 열리다가 1996년부터 중단되었다. 또한 이때부터 경축 행사가 라디오로 생방송 되었는데, TV로 이를 생중계한 것은 1971년부터다. 1955년에는 광복 10주년을 맞아 서울운동장에서 대대적인 기념식이 개최되었고 ‘제7주년 정부수립기념식’도 같이 치렀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시적으로 광복절 당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되었고, 창경궁·덕수궁 등이 무료로 개방되었으며, 광복절 전후로 전국적으로 비상경계령이 내려졌는데 이는 1972년부터 중단되었다. 1959년부터는 보신각에서 타종 행사를 시작하였고, 일본 교포들의 모국 방문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는데 점차, 중국·미주 등지의 교포들로 확대되었다.
1960~1970년대, 독립유공자 포상·기념물 제막 등
1960년 광복절 행사는 4·19혁명 이후 출범한 제2공화국에서 처음으로 치러졌다. 이때에도 대북 메시지는 ‘북진통일’이었다. 대국민 메시지는 ‘국민 협력’이었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축사에서 쿠데타의 정당성을 강조하면서 ‘혁명 공약’의 이행을 거듭 천명하였다. 이날 대북 메시지는 예전과 달리 북진통일이 아닌 남북한대표회담이었다. 1962년부터 1979년 박정희 집권 내내 광복절 행사는 시민회관, 서울운동장, 중앙청 광장, 효창공원, 장충동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 여러 곳에서 열렸다. 이해부터 행사명이 ‘제○○주년 광복절’로 고정되었고 독립유공자 포상도 이뤄졌다. 1963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경축사에서 주요 현안을 거론하면서 국민에게 이해를 구했다. 1964년에는 경제개발, 빈곤 해방, 승공 통일이 강조되었고, 1965년에는 월남파병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박정희 정권 당시는 광복절을 맞아 탑골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등 기념물 제막식이나 남산 1호터널(1970)·3·1고가차도(1971)·지하철 1호선 개통(1974) 등의 준공식을 겸하였다. 1970년부터 박정희 정권의 대북 정책은 ‘평화통일’ 원칙이 강조되었고 남북회담, 남북 이산가족 찾기 등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1971년 9월 판문점 자유의 집과 판문각에 남북적십자회담 상설연락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이는 2008년 이후 폐지와 복원을 반복하다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연락사무소에 흡수되었다. 1972년에는 7·4남북공동성명의 성실한 이행, 이산가족 상봉, 자주통일 등을 경축사에 담았고, 1973년에는 처음으로 남북 동시 유엔 가입이 제안되었다. 이는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1년 9월 현실화되었다. 1974년에는 ‘평화통일 3대 기본 원칙’을 천명하였으나 육영수 여사가 피격·사망하면서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이후 박정희는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더욱이 1976년 8월 판문점도끼만행사건으로 인해 대북 관계는 경색되었다.
1980년대, 이산가족 상봉·독립기념관 개관 등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이전과 달리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했다. 또한 일본 내 우익 인사들의 망언, 역사 왜곡 등으로 한일 간에 갈등이 고조될 때는 이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특히 1982년에는 ‘일본역사교과서왜곡사건’이 일어난 직후여서 과거 일제의 침략 행위를 강력히 비판하고 극일(克日)을 위한 국력 신장을 역설하였다. 1983년에는 광복절을 기념하여 독립기념관 기공식이 치러졌고 이산가족 상봉을 북한 측에 촉구하였는데, 이는 1985년 9월 처음으로 이뤄졌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중단되었다가 2000년 8월에서야 재개되어 2018년 8월까지 모두 21차례 진행되었다. 1987년에는 독립기념관 개관식을 겸했는데, 이후 2004년까지 광복절 행사는 주로 독립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1988년 2월 노태우 정부를 시작으로 제6공화국이 들어섰다. 노태우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광복절 경축사의 핵심 내용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시기의 특징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구체화되었고 대일 메시지가 강화되었으며 국정운영·방향 등이 강조되었다.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기에 남북 관계는 원만하였다. 이에 1988년 광복절에 다시금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촉구하였고 이에 김일성이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급물살을 탔지만, 여러 이유로 불발되고 말았다. 특히 1973년에 추진하였던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다시 제안하여 1991년 9월 이를 성사시켰다. 1992년에 설악산·금강산 개방도 재차 제안했는데, 이는 꾸준히 추진되어 금강산 관광이 1998년 11월부터 2008년 7월까지 약 10년간 이뤄졌다. 한편, 1992년 5월 북한이 IAEA 사찰을 수용하자, 그해 경축사에서 남북한 경제 협력 문제를 제안했다.
독립기념관 개관 경축행사(1987.8.15)
1990~2000년대,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진상규명특별위원회 설치 등
1993년에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첫 광복절에 ‘제2의 광복’, ‘신한국의 창조’를 천명하였다. 대북 정책으로는 핵무기 개발 의혹 해소, 남북 경제 협력, 이산가족 상호방문·서신교환, 판문점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등이 제안되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에는 ‘3단계 통일방안’(북한의 개혁개방, 화해 협력, 남북 연합 통일국가 완성)을 제시하는가 하면 남북기본합의서·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이행 준수, 비방 중지, 군사적 신뢰 구축 등을 거듭 촉구하였다. 1995년에는 광복절 50주년을 맞아 옛 조선총독부 건물 첨탑 철거 퍼포먼스를 연출하고 정치·경제의 선진화·세계화 등 국정운영 기조를 밝혔다. 특히 그즈음 일본 총리의 과거 식민지 시기에 대한 사죄에 김영삼은 두 나라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기대한다고 했다. 하지만, 1996년 일본 장관의 망언, 배타적경제수역(EEZ)의 경계 획정, 독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한일 간의 갈등은 증폭되었다.
1998년에는 김대중 정부로 바뀐 뒤 IMF 극복이 제일 우선이었기에 총체적 개혁과 국민적 운동, ‘제2 건국 운동’을 주창하고 국정과제를 제시하였다. 특히 그해 6월 북한 잠수함 강릉침투사건에도 불구하고 남북 교류 협력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남북상설대화기구 창설 등을 제안하였다. 이후 1999~2002년에는 외환위기 극복, 개혁 과제 등 국정운영 방향을 밝히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특히 2000년에는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었기에 ‘평화와 도약의 한반도 시대’를 열어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 역시 경축사에서 국정 철학이나 비전을 언급하였다. 2004년에는 과거사 진상 규명을 강조하고 진상규명특별위원회 설치를 제안하였으며, 2005년에는 ‘광복 60주년 기념식’도 병행하면서 ‘화해와 국민통합’을 강조하였다. 2007년에는 6자회담과 남북대화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 체제로의 전환을 강조한 가운데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대일 관계에는 2003년과 2005년에 일본 우익세력의 망언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강조하였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후 첫 광복절에 ‘건국 60주년’ 명칭을 사용하는 바람에 큰 논란이 일었다. 이는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졌다. 이날 이명박은 경제성장을 중점에 둔 ‘선진 일류 국가’ 건설을 강조하고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미래 비전을 제시하였다. 2009년에는 ‘친서민 중도실용’ 정책 비전과 함께 ‘더 큰 대한민국’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다. 2010년에는 ‘공정한 사회’를 핵심 키워드로 제시했고 대북 관련해서 ‘통일 재원 마련’을 위한 공론화를 제안하였다. 이명박 정부 당시 한일 관계가 원만하였지만, 2011년 일본과의 독도 갈등에 “일본은 미래 세대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책임이 있다”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2013년 대통령에 취임한 박근혜는 첫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에 핵을 버리고 ‘평화의 통일시대’를 열어가고 이산가족 상봉, 비무장지대 세계평화공원 조성, 환경·민생·문화 등 3대 통로 개설 확충 등을 제안했지만, 재임 중 남북 관계는 경색되어 개성공단이 폐쇄되었다. 특히 2015년 12월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했다고 하여 2018년 11월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 엔으로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되었지만,2019년 해산되었다.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뒤 첫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반도 평화 정착을 통한 분단 극복이 진정한 광복을 완성하는 것’이라며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광복절 경축사에 ‘남북이 경제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진정한 광복’이라 강조하였다. 2021년 임기 마지막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미래 청사진을 제시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배상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 등으로 인해 임기 내내 한일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 4대 국경일 중에 3·1절과 광복절은 일제의 식민 지배와 관련이 깊다.
이에 역대 정권은 광복절을 단순히 일제 식민지로부터의 광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남북 관계를 비롯하여 국정운영의 비전을 제시하는 기회로 활용하였다.
남북 관계는 1950년대 ‘북진통일론’에서 1960~1970년대에는 ‘평화통일’로 기조를 바꾼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통일 원칙이나 많은 제안은 그것을 실현시키는데 시일이 오래 걸렸지만, 하나씩 이뤄지면서 평화통일에 다가서고 있다.
올해 8월 15일 광복절 78주년을 맞아 남북 관계를 개선·발전시키는 통일 방안과 아울러 선진국에 걸맞은 국정 비전을 기대해 본다. ”
독립기념관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