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 5월,
아이와 함께 거니는 사적지 나들이
서울 북촌
글·사진 박광일 (역사여행작가·여행이야기 대표)
조선왕조 초기부터 명문대가가 자리 잡았던 북촌은 현재까지 600여 년의 역사와 함께 수많은 인물의 흔적들이 켜켜이 쌓인 곳이기도 하다.
보통 북촌이라고 하면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 한옥이 많은 마을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 인사동 일대까지 포함하기도 한다.
화창한 날씨 덕에 나들이하기 좋은 5월, 가족과 함께 ‘어린이날’의 의미를 살펴보며 우리 역사와 문화도 함께 둘러볼 수 있는 ‘북촌’ 일대를 거닐어 보는 건 어떨까.
천도교중앙대교당
3·1운동의 발판, 천도교중앙대교당
북촌에서 처음 살펴볼 곳은 바로 ‘천도교중앙대교당’이다. 인사동 옆 경운동에 있는 이 건물은 이국적인 외관으로 쉽게 눈에 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학에서 이름을 바꾼 천도교의 교당이다. 일제강점기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토, 그리고 불교와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종교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당시 큰 세력이었던 민족종교, 곧 대종교나 천도교는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천도교는 어려움을 해결할 방법 가운데 하나로 새로운 모습의 교당을 짓기로 했다. 이를 위해 1918년 천도교 교인들은 성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1918년 12월 본격적인 교당 건축 공사에 들어갔다. 하지만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공사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후 3·1운동의 열기가 잠잠해진 뒤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1921년 2월 28일 지금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완공된 시기를 보면 천도교중앙대교당은 현재 102살이나 된 건물이다.
천도교중앙대교당은 3·1운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3·1운동 당시 천도교 독립운동자금의 상당 부분이 대교당을 짓기 위해 모은 자금에서 나왔다. 교인들이 모은 성금 가운데 일부는 교당을 짓는 것에, 또 다른 일부는 독립운동자금으로 활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천도교중앙대교당은 독립운동의 공이 있는 건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천도교중앙대교당을 5월에 꼭 한번 찾아야 할 이유는 바로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 기념비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어린이날, 더 나아가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어린이 운동’이 시작된 장소이다. 국제연합에서 ‘국제아동인권선언’을 발표한 해가 1924년인데, 우리나라에서 처음 어린이날을 기념한 해는 1922년이니 2년이나 빨랐다.
어린이날을 만든 인물은 소파 방정환이다. 그 역시 천도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방정환은 천도교 3대 교주이자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손병희의 사위였으며, 천도교 안에서 이뤄지고 있던 어린이 권리에 대한 운동을 바탕으로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당시 어린이는 ‘애녀석’, ‘어린애’ 등으로 불리는 처지였다. ‘어린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방정환은 ‘늙은이’나 ‘젊은이’의 호칭과 동격으로 어린이들도 인격을 지닌 존재로서 높여 부르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1920년 천도교에서 ‘진주소년회’가 조직된 것을 참고하여,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1922년 천도교소년회는 어린이날을 5월 1일로 정하고 행사까지 열었고 그 중심에는 방정환이 있었다.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한 것 말고도 동화구연 행사, 동화집 『사랑의 선물』 발간, 잡지 『어린이』 발간, 색동회 구성 등 어린이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193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방정환의 무덤은 ‘망우리 역사문화공원’에 있다. 방정환이 죽음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탁한 유언은 “어린이를 잘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의 표석 앞에서 어린이날의 의미와 방정환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일대로 457
* 연중개방
세계어린이운동발상지기념비
한양 골목길 속으로,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역사를 살펴보았다면 다음으로는 이 일대의 역사 유적을 살펴보자. 많은 곳 중에 이번에 찾아볼 곳은 조금 독특한 이름을 가진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이다. 이 전시관은 다른 곳의 유적이 아닌 바로 이곳 ‘공평동’에서 발견된 ‘도시유적’을 그대로 전시관으로 만든 곳이다.
2015년 공평1·2·4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조선 한양에서 근대 경성에 이르는 역사도시 서울의 골목길과 건물터가 온전하게 발굴되었다. 서울시는 도시유적을 원래 위치에 전면적으로 보존하고자 하나의 원칙을 정하였다. 바로 발굴 과정에서 유적이 나오면 유적은 전시관으로 조성하고 그 전시관보다 조금 더 넓은 면적의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적도 보호하고 건물을 짓는 사람에게 보상이 될 수 있도록 정한 규칙이다. 그리하여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2018년 9월 12일 개관하였다. 도심환경정비사업에서 발굴되는 매장문화재를 최대한 ‘원 위치 전면 보존’한다는 ‘공평동 룰’을 적용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이유로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다른 박물관과 달리 대형 건물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그리고 내려가서 보면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참고로 서울의 지층은 약 1미터 정도이며 100년의 역사가 담겨있다. 예를 들어 1미터 지하에는 100년 전 역사가, 2미터 지하에는 200년 전 역사가 담겨있는 것이다.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유적은 4~5미터 지하에 있는데 16~17세기, 곧 임진왜란 이후 대규모로 재건축이 일어난 시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은 널리 알려진 박물관은 아니지만 인사동 일대, 서울을 탐험하는 느낌으로 가족과 함께 들러볼 수 있는 곳이다.
주소 & 관람 시간 & 관람료 & 문의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26, 센트로폴리스빌딩 지하1층 | 오전 9시~오후 6시 | 무료 | 02-724-0135
*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공평도시유적전시관
세종의 마지막 숨결이 깃든, 서울공예박물관
마지막으로 살펴볼 곳은 최근에 생긴 ‘서울공예박물관’이다. 2017년까지 학교 등으로 사용된 이 건물은 새롭게 정비하여 2021년 7월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여느 박물관과 다른 외관과 공간 배치를 보여주는 이곳은 내력 또한 흥미롭다.
서울공예박물관 터는 조선시대 때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집이 있던 곳이다. 당시 세종은 영응대군에게 큰 집을 지어주었는데, 그 이유는 세종이 궁궐을 나갈 일이 있으면 영응대군의 집에 머물려고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실제로 세종은 말년에 병이 깊어지자, 영응대군 집으로 옮겨가 승하하였다. 이처럼 서울공예박물관은 세종의 마지막 숨결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이후 영응대군의 집은 조선 왕실의 왕자와 공주 집으로 쓰이다가 조선 후기에는 ‘별궁’으로 활용했다. 별궁은 궁궐에서 가례를 치를 때 왕비나 세자빈이 잠시 머무는 곳으로 여기에 찾아온 왕이나 세자와 함께 궁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시 궁중 나인의 거처로 쓰이다가 이 자리에 학교가 들어섰다. 마지막에 들어선 학교는 1945년에 개교한 풍문여고였다.
서울공예박물관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공예박물관’인데, 서울시에서 풍문여고 건물 5개 동을 리모델링하여 건축한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이다. 이제까지 공예품은 다른 전시관에서 늘 조연이었다면 여기에서는 주연이다. 더 나아가 공예품뿐 아니라 그런 작품을 만든 장인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박물관과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국가에 소속된 장인 ‘경공장’, ‘외공장’과 함께 다양한 공예품을 만든 장인에 대한 내력을 보거나 혹은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곳이다.
주소 & 관람 시간 & 관람료 & 문의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3길 4 | 오전 10시~오후 6시 | 무료 | 02-6450-7000
* 매주 월요일 정기휴관
서울공예박물관 전경(좌), 서울공예박물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