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5월호
이달의 독립운동가

일본 제국에 맞서
한국 독립을 지원한 일본인들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글 독립기념관 전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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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과 재일 한인 탄압

1923년 9월 1일 일본 도쿄(東京)를 비롯한 관동(關東)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혼란한 와중에 ‘조선인이 방화하거나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재일 한인 6,600여 명이 자경단(自警團) 등에 의해 학살되었고, 일본군경에 의해 한인들이 무작위로 붙잡혔다. 일본정부는 관동대학살에 대한 비판을 돌리고자 가네코 후미코와 박열의 일왕 및 요인 처단 계획을 ‘대역사건’으로 부풀려 두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적극적인 법정투쟁으로 맞섰으며 후세 다쓰지는 두 사람의 변론을 맡아 지원했다. 가네코 후미코와 후세 다쓰지는 일본인임에도 한국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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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한인을 학살하는 자경단(좌), 「1만의 희생자!!!」『독립신문』(1923.12.5.)_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우)

박열과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을 전개한 일본인 여성,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橫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를 받다가 9살 때 한국의 고모부 집으로 보내졌다. 1919년 3월 충북 청주군의 3·1운동을 목격하고 한국인의 처지에 깊이 공감했다. 일본으로 돌아와 1922년 박열과 만났으며 흑우회(黑友會)와 불령사(不逞社) 등의 아나키스트 단체에 참여해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 등을 발표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경에게 붙잡혀 심문받던 중 일왕 및 요인 처단 계획이 드러나자 자신의 사상과 실천 계획을 상세히 밝혔다. 가네코 후미코는 1차 공판에서 박열과 함께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등 법정투쟁을 전개했으며 1926년 3월 25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일제는 회유목적으로 형(刑)을 줄이는 은사령(恩赦令)을 내렸지만 그녀는 문서를 찢어버리는 방식으로 저항했고 1926년 7월 옥중에서 사망했다. 정부는 그녀의 공훈을 기리어 2018년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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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토이센진(太ぃ鮮人)』 제2호 (1922.12.)_박열의사기념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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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을 착용한 채 공판을 받는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국제사진정보』5권 4호 (1926.4.)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한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布施辰治)

후세 다쓰지는 1879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에서 태어나 1899년 도쿄 메이지법률학교에 입학해 1903년 변호사가 되었다.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붙잡힌 재일 한인 유학생 을 변호한 것을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지지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재일 한인 학살의 진상을 조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조사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1924년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졌던 의열단원 김지섭을 변호했고, 1926년 법정투쟁을 벌이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변론을 맡아 일제 식민지배의 부당성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옥중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사망하자 가매장된 그녀의 유해를 되찾는 데 노력했다. 이후 1926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지주층을 상대로 한 전남 나주군 농민들의 토지반환 투쟁을 도와 한국 농민의 입장을 대변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일본인에게는 최초로 2004년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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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김희섭에게 보낸 서한 (192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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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의 일본인으로서 전 조선 형제에 사죄」 『시대일보』 (1926.3.6.)_국립중앙도서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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