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1월호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만세운동의 불길 속에서
조선인의 살 길을 찾고자 한
이창하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 자료발굴 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처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이창하 (李昌河)

본적 및 주소 :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대평리 6

생몰 : 1888.12.8 ~ 미상

이명 : 이오림(李五林)

포상추천 : 2018년 3월

포상 : 2021년 3.1절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족장

운동방면 : 3.1운동, 국내항일, 만주방면


만세운동의 불길 속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다

이창하는 1888년 12월 8일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대평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대부분의 조선 민중이 그러했듯 그 역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 조국의 현실은 그를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의 ‘불길’은 이창하가 살고 있던 이원군까지 번졌다. 5일 누군가 이원군의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앞으로 독립선언서를 발송한 사실이 일본 관헌에 발각됐다. 독립선언서는 모조리 압수되었으나 이원군에 퍼진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소문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틀 뒤 박용해라는 인물이 천도교 이원교구장 김병준을 찾아와 손병희 등이 서울에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다고 전하며 독립선언서를 전달했다. 김병준은 이원군의 천도교 원로들을 소집해 논의한 끝에 천도교의 대기도일(大祈禱日)인 10일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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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이원군 대평리 산성 전경_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와 인도에 따른의사표현이지 범죄가 아니다”

3월 10일 오전 11시 30분경 천도교도와 주민 등 700여 명은 「조선민족독립단」이라는 깃발 아래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행진했다. 천도교도로서 계획 단계부터 참여했던 이창하는 선두에서 군중을 지휘했다. 장터에서 시작된 시위행렬은 이원공립보통학교, 군청을 지나 헌병주재소 앞에 머무르며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다시 장터로 이동한 후 해산하였다. 이창하는 거주지인 동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키고자 계획하고 마을 구장을 통해 주민들에게 통지서를 보내는 한편,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을 직접 만나 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다. 17일 용암리 시장에 모인 주민 200여 명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이번에는 ‘독립만세’만을 외친 것이 아니었다. 납입한 세금을 돌려달라는 구호가 새롭게 등장했다. 이제 만세운동은 일제 행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20일 오후 3시경 이원읍 헌병주재소 앞에는 이원군 전 지역에서 주민 1,5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되어 주재소에 유치 중인 주민들을 풀어줄 것을 요구했다.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고 군중은 갇혀있는 이웃들을 강제로라도 빼내고자 육탄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에 헌병대는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결국 이 과정에서 주민 1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헌병대는 만세운동의 주도자를 샅샅이 색출하였는데 22일 이창하도 검거되었다. 그는 1919년 6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했으나, 8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동일한 형을 받았다. 이창하는 “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正義)와 인도(人道)에 따른 의사표현이지 범죄가 아니다”라며 판결에 불복하고 상고하였다. 그러나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는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감형되어 1920년 4월 27일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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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소요범인 판결」, 『매일신보』 (1919.8.22)

‘조선인의 살 길’을 고민하고, 기자로 활동하다

출옥 후 이창하는 주민에 대한 계몽활동에 주력하였다. 1923년 이원청년연합회에서 주최한 순회강연에 연사로 참여하여 이원군 각지를 돌아다니며 ‘우리들의 불평’, ‘사회와 나’, ‘조선인의 살 길’ 등의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그는 3·1운동 이후 한국인이 나아가야 할 바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이창하는 1925년 6월 시대일보 이원지국이 설립되자 기자로서 언론활동을 시작했다. 시대일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함께 한국인이 발행한 대표적 민간신문으로, 편집장은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최남선이었다. 청년연합회의 강연활동이나, 기자로서의 언론활동은 3·1운동으로 쟁취한 문화정치의 합법적 활동 공간을 활용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화정치의 기만성과 합법적 활동의 한계를 곧 깨닫게 되었다.


불의한 학교 당국에 항의하다 고초를 겪다

1924년 조선총독 사이토가 국경을 시찰하던 도중 이원군을 방문했는데, 이원공립보통학교 교장은 조선인 여학생 3명을 불러 총독에게 차를 따르게 했다. 교육자인 교장이 여학생을 접대부로 동원했다는 사실에 지역사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이원청년연합회에서는 이창하 등 3명을 대표위원으로 선정하여 학교 당국에 항의했다. 이창하는 교장을 문책하고 향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는 사과문을 쓰게 했다. 이로써 불미스러운 사태가 수습되는가 싶었으나, 이원경찰서에서는 이창하 등이 교장을 협박했다며 구류 5일에 처하였다. 이창하를 비롯한 청년연합회에서 이에 대해 강하게 저항했으나, 형량은 오히려 구류 10일로 늘었다. 사법권의 객관적 집행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처사였다. 이후 한동안 국내에서 이창하의 행적은 찾기 어렵다. 이 무렵 그는 불혹에 가까운 나이였고, 잘못도 없이 구류에 처해졌던 경험으로 인해 상심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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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혁명당 이창하 징역 2년」, 『중외일보』 (1929.9.27)

새로운 공간에서 독립운동의 꿈을 이어 고향으로 돌아오다

1929년 음력 6월 3일 이창하는 평북경찰부에 체포되어 신의주검사국으로 압송됐다. 경찰조사에 따르면, 그는 이미 191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에 가입했다고 한다. 철혈광복단의 성립 시기나 그의 가입 시기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1916년 용정촌으로 이주한 누이동생을 이창하가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곳에서 독립운동단체와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국내활동에 실망한 그에게 해외 독립운동 지사들과 접촉했던 경험은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창하는 1929년 음력 4월 누이동생을 방문하고자 용정촌에 갔다가 한국혁명당 북만총국 부장인 황욱을 만났다. 당시 황욱은 그 해 9월 경성에서 열릴 조선박람회를 기하여 일제에 타격을 가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한국혁명당 연락부 위원으로 선임된 이창하는 황욱의 명령에 따라 고향인 이원군으로 파견되어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연락기관 조직을 위해 기회를 엿보던 중 안타깝게도 밀정의 밀고로 체포됐다. 이로 인해 그는 1929년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10월 21일에 출옥하였다.


옥고를 치른 이후에도 이어진 고단한 독립운동가의 삶

두 번의 옥고를 치른 이창하는 일제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분류되어 함남 지역에서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만 일어나면 검거되어 조사를 받았다. 1933년에도 북청군을 중심으로 벌어진 사상범 검거 선풍으로 선생은 또 다시 검거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그의 행적은 공식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1984년 발행된 『이원군지』에는 선생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 이렇게 기록되었다.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자가 되어 갖은 천대를 받다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향리에서 병사(病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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