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끝으로 되살린
허스토리(Herstory)
화가 윤석남
글 편집실 사진 학고재 제공
항일투쟁의 현장에는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가 있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인물은 몇몇에 불과하다.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화가 윤석남이다.
윤석남 프로필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40대에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 그래픽 센터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97년 국무총리상, 2015년 제29회 김세중 조각상, 2019년 국민훈장 모란장, 2022년 제23회 이인성미술상 등을 수상하였다.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일본 후쿠오카미술관, 런던 테이트 컬렉션 등 주요 미술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을 시작한 지 40년이 훌쩍 지났다.
그림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그림의 주제가 주변의 이야기에서 객관적인 삶의 이야기로 넓어졌다. 기법도 유화·아크릴을 사용하는 서양화에서 10년 전부터 한국화 쪽으로 바뀌었다. 변화 과정을 세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10여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윤두서의 자화상을 본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작품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가슴이 두근두근할 만큼 생생하다. 그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한국화를 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한국화 중에서도 여성주의적 성찰을 화두로초상화에 집중했다.
서양화 기법에서 한국화 기법으로 방향을 전환한 계기가 윤두서 초상이었으므로 처음부터 초상화에 집중했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공부하다 보니, 조선왕조 500년 동안 그려진 초상화들의 주인공 대부분이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 사실이 참 울컥했다. 그리하여 주변 친구들의 초상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역사 속 발자취를 남긴 여성 중에서도여성독립운동가를 조명하고 있다.
2019년 가을, 초상들로 개인전을 하면서 다음 초상화는 무엇으로 할까 고민했다. 남성이 주인공인 수많은 초상화와 달리 여성 초상화는 없던 것이 떠올랐다. 조선이 망할 무렵의 작품 두 점이 있었으나 그것도 주인공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때의 쓰라린 자각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때렸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때부터 다음 전시는 ‘여성독립운동가’로 하겠다고 마음먹었고, 역사가 충분히 주목하지 않은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화폭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여성독립운동가들은 사진이나 자료 등이많이 남아있지 않는데, 고충은 없나.
그나마 남겨진 사진에 기초해 초상화를 그려나간다. 사실 사진과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작업을 하는 내내 걱정과 막막함이 크다. 어찌 됐든 내 창작이 보태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계속 그림 속 인물들과 대화한다. ‘미안합니다’, ‘제가 잘못 그릴 수도 있어요’라고 빌고 또 빈다. 100년 전 여성들의 투쟁사가 나를 무겁게 눌러 괴로울 때도 있다. 그때마다 그들의 정신에 의지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한 번도 자신의 삶을 후회하거나 한탄하지 않았던 사람들, 강인하고 올곧은 그들의 정신에 기대어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손이 유독 크고 거칠다.
화가가 손으로 붓을 잡고 그림을 그리듯 손은 그 사람의 생애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손은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신체 부위다. 그래서 독립투사들의 손을 마냥 하얗고 곱게 그릴 수 없었다. 자립적인 그들의 삶을 대변하기 위해 크고 투박하게 그렸다. 이 투박한 손이 여느 작고 고운 손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인물이나 작품이 있나.
모든 여성독립운동가를 존경하지만, 특히 김마리아의 삶이 유독 가슴에 와닿는다. 그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일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받아 고질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독립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는 늘 당당했고 두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그림 속 그의 몸짓이 진취적일 수밖에 없다. 칠판 앞에서 당찬 얼굴로 팔을 쭉 뻗고 독립에 대해 교육하는 모습을 표현했는데, 독립에 대한 열망과 한국인으로서의 당당함을 여실히 담아내려고 했다.
‘제주 여성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한특별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제주 여성독립운동가〉 특별기획전이 현재 제주 설문대여성문화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제주 여성의 독립운동을 재조명하고자 마련되었으며, 올해 3월 7일까지 진행된다. 이번 특별전에는 강평국·김시숙·고수선·최정숙·김옥련·부춘화 등 6인의 제주여성 독립운동가의 초상화가 전시된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라는 격랑의 시기에 식민통치와 가부장적 사회구조, 척박한 자연환경에 맞서 ‘여성교육’을 통해 ‘여성의식’을 뿌리내리고 확장시켰다. 이번 전시를 통해 세상에 맞서 우뚝 선 제주 여성독립운동가의 삶을 만나고, 동시에 우리 안에 도저한 강물로 흐르는 여성 주체와 만나는 또 다른 계기가 되길 바란다.
여성독립운동가 100인을 그린다는 목표는아직 변함이 없나.
앞으로도 조명할 인물이 많다. 역사 속 여성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그림으로 복원해내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 나갈 것이다. 여성독립운동가 100인의 초상을 완성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여든이 훌쩍 넘은 지금, 체력이 언제까지 따라줄지 모르겠지만(웃음)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다.
김마리아 초상(좌), 한지 위에 분채, 210 x 94cm (2020)
일제의 고문으로 한쪽 가슴을 잃어 섶의 길이가 다른 저고리를 지어 입었던 김마리아는 뼛속에 고름이 생기는 병을 앓았다.
그림 속 김마리아는 평화를 상징하는 손가락 포즈를 취하며 눈부시게 웃고 있다.
박자혜 초상(우), 한지 위에 분채, 210 x 94cm (2020)
붉은 천으로 감싼 남편의 유골함, 마디마디 힘을 준 손가락, 검은 상복. 그의 눈빛은 깊은 슬픔 속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의지로 이글거린다.
박자혜는 단재 신채호의 부인이자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