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애국지사님들,
새해 문안 인사드립니다
글 이계형 (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2023년 1월 현재 생존한 애국지사는 모두 10명 정도다. 애국지사란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분’들을 뜻한다. 생존 애국지사들은 해마다
그 숫자를 달리하는 만큼 계묘년 새해를 맞아 그분들의 독립운동을 살펴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건강을 기원하고자 한다.
광복군 출신의 오성규·김영관·오상근·오희옥
현존 지사들의 평균 나이는 99.1세이고 가장 나이가 적으신 분이 오희옥·이석규 지사로 97세이고, 가장 연장자는 102세 권중혁·이하전 지사이다. 오성규 지사는 올해 100세이다. 먼저 이분들의 독립운동을 간략히 살피려 한다. 현존 지사 10명 가운데 광복군 출신이 4명으로 가장 많다. 오성규(1923~)·김영관(1924~)·오상근(1924~)·오희옥(1926~) 등이다. 오성규 지사는 일본 도쿄 네리마에 살고 있다. 그는 평북 선천 출신으로 1938년경 신성중학 재학 중 16살에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 펑톈 소재 동광중학을 중심으로 비밀조직망을 조직 및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에 조직이 탄로 나자 동지들과 함께 베이징으로 탈출하였고, 이후 중국 안후이성 푸양의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1945년 5월 ‘독수리 작전’을 수행할 미국 OSS(전략정보처) 교육훈련 대원으로 선발되어, 그해 7월 초부터 푸양시 리황에서 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그해 8월 일제가 항복하면서 수포가 되었다. 광복 후 중국 내 교민 보호와 선무공작을 위해 상해지구 특파단원으로 활동하였다. 김영관·오상근 지사는 1924년생으로 1944년 만 20세로 징병 대상이었는데 광복군에 투신하는 과정은 다르다. 오상근 지사의 실제 1923년생이었다고 한다. 김영관 지사는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고교 졸업을 앞두고 징병을 피하고자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하였지만 강제 징병 되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1943년 3월 ‘징병제’를 공포하고, 이듬해 신체검사 후 1944년 9월 4만 5천여 명을 현역병으로 입대시켰다. 그중 한 명이었던 그는 중국 저장성 동양에 주둔 중인 일본군에 배속되었다. 평소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고 있던 그는 동료들과 함께 그해 11월(혹은 12월)에 목숨 건 탈출을 감행하였다. 당시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은 너무 멀어 중국 장시성의 중국 중앙군 제3전구 충의구군국 총지휘부에 입대하였고, 3개월 뒤 고생 끝에 그곳 상라오에 있던 광복군 제1지대 2구대 징모 제3분처에 합류하여 광복 때까지 활동하였다.오상근 지사는 충북 진천 출신으로 1942년 조선육군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여 1943년 9월경 중국 광시성 구이린의 일본 이라시 부대에 배치되었다. 지원병이라고 하지만, 강압으로 마지못해 지원한 경우였다. 그는 1944년 1월 인근에서 광복군이 활동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동료들과 함께 일본군 부대에서 탈출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일본군 간첩으로 오인되어 감옥에서 고초를 겪기도 했다. 천신만고 끝에 그해 12월 임시정부가 있던 충칭에 도착하였고, 이내 광복군 총사령부 토교대에 배속되어 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의 신변을 경호하였다.오희옥 지사는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유일한 여성이다. 독립운동가 오광선의 차녀로 14세이던 1939년 4월 중국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일본군의 정보수집, 초모와 연극·무용 등을 통한 한국인 사병의 위무활동을 펼쳤다. 1941년 1월 광복군 제5지대에 편입하였고, 1944년에는 한국독립당 당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징병을 미화하고자 선전용으로 발행한 엽서_독립기념관 소장(좌), 중국 창사에서 열렸던 제19주년 삼일절 기념공연 기념사진 (1938.3.1.)_앞줄 오른쪽에서 8번째가 오희옥(우)
학생운동을 펼친 이하전·지익표·이석규
이하전(1921~)·지익표(1925~)·이석규(1926~) 지사 등은 태평양전쟁 시기 학생운동을 펼쳤다. 이하전 지사는 미국에 거주하는데 평양 출신이다. 숭인상업학교 재학 중 일본인의 차별대우와 억압에서 벗어날 방도를 궁리하다가 1938년 10월경 오영빈·김구섭 등과 함께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 활동하였다. 이후 그는 모임을 축산계로 개칭하고 월례회를 개최하였으며 ‘오등의 서사’라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항일의식을 다졌다. 졸업 후 그는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1941년 1월 법정대학 예과에 재학 중에도 비밀결사 운동을 계속하다가 경찰에 붙잡혀 고향으로 압송되었고, 그해 12월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지익표 지사는 전남 완도 출신으로 1942년 여수공립수산학교 4학년 재학 중 동향인 김민석·오영섭 등과 독서회를 조직하고 민족정신을 함양했다. 당시 일본인 교사들의 한민족 모욕 발언으로 한국 학생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에 그는 1942년 11월 선배들과 함께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 차별적 언행 시정 촉구와 추방·모국어 허용 등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하면 징병 거부 투쟁을 벌이겠다고 공언하였다. 이에 그는 체포되어 그해 12월 광주검사국에 송치되었지만, 1943년 1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이석규 지사는 전북 출신으로 1943년 3월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 동급생 17명과 함께 무등독서회를 조직하였다. 그는 이를 통해 민족의식을 함양하였고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 시에 봉기할 것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다. 그러던 중 1945년 회원이 붙잡혀 거사 계획이 탄로 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그 결과 그해 5월 퇴학당하였고 10개월가량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 후 석방되었다.
광복을 맞아 출옥한 이일남·강태선·권중혁
이일남(1925~) 지사는 충남 금산 출신으로 1942년 6월 전주사범학교 재학 중 일본인 교장의 노골적인 민족차별에 분개하여 비밀결사 ‘우리회’를 조직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이후 1943년 12월 만주에 거점을 마련하고자 그곳으로 떠나 독립군과 접선을 시도하였지만, 별다른 결실을 얻지 못하고 1944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그는 독립 자금을 마련하고자 1945년 1월에 충남 금산사방관리소 인부로 취업하였다가 일본 헌병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그는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를 받아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 후 출옥하였다. 강태선(1924~) 지사는 제주 출신으로 여느 지사들과 달리 일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1942년 6월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신문 배달을 하며 중학교 입학을 준비하던 중 한국인 차별대우에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해 8월경 그는 같은 처지에 있던 동지들과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하였다. 일제가 곧 패망할 것이라며 일제히 봉기하면 독립할 것으로 판단하였고, 일제의 동화정책에 강력히 저항하고자 하였다. 이를 추진하고자 여러 번 협의하고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1944년 6월 경찰에 붙잡혔다. 그해 8월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이와 달리 권중혁 지사는 경북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 재학 중 학병으로 강제 징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탈출하였지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1943년 강제 징병을 시행하고서는 1944년대학이나 전문학교 학생들까지 징병해갔다. 이들을 ‘학도특별지원병’(학병)이라 한다. 학병은 1944년 1월 20일에 끌려갔는데 그 역시 대구 24부대에 모집된 600여 명과 함께 입대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중국 화북으로 보내졌지만 그를 포함한 27명은 남았다. 그해 8월 그는 몇몇 동지들과 함께 부대 하수구를 통해 탈출에 성공하여 대구 팔공산에 숨어 지내다가 이를 탐지한 일본 군경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일본군 임시군법회의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일본 기타큐슈의 고쿠라육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독립운동이란 최고선을 실천한 역사의 증인들
예전 생존 애국지사들은 삼일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거나 광복절에는 만세 삼창을 선창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광복회장을 맡아 왕성하게 활동하기도 하였다. 요즘에는 거동이 불편한 지사들이 많아져 대외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보훈처장 등이 직접 찾아가 건강을 살피거나 위문품을 전달하곤 한다. 2021년 8월에 국가보훈처가 생존 애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선물하였다. 생존 애국지사들은 우리나라가 엄혹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 ‘독립운동’이란 최고선을 실천한 역사의 증인들이다. 2023년 1월 현재 독립유공자 1만 7,588명 가운데 10분이라도 생존해 계시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기리는 것은 그분들이 지키고 일구려 하였던 독립 국가에 사는 우리의 몫이다. 새해를 맞아 애국지사님들의 만수무강을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