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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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조직적 투쟁,
원산 노동자 총파업



글 김경일 (사회학·한국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원산 노동자 총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함경남도 원산 지역에서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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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노동자 총파업 당시 사진 (1929)

총파업의 발단 

1928년 9월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가 운영한 문평제유공장에서 일본인 감독 코다마가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코다마의 파면을 포함한 5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20일간 파업했다. 회사 측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3개월 안에 해결할 것을 약속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1929년 1월 문평제유노동조합은 다시 파업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이끌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최저임금제 확립·8시간 노동·감독관 파면·대우 개선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원산 지역 일본인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해고시키거나 탄압하는 데 앞장섰으며, 일제 경찰들은 노동운동가들을 구속하였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생활고를 견디며 약 3개월간 파업을 이어갔다. 해륙노동조합·운반노동조합 등 원산 지역 노동조합은 속속히 파업에 가담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성금이 들어왔다. 그러나 일제의 노골적이며 기습적인 탄압이 심해지면서  결국 4월 6일 원산노동연합회는 파업을 종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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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노동연합회 모습, 『조선일보』, (1929.2.8.)

일본 제국주의가 내던진 일대의 결전 

1929년의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하 총파업)은 그 규모나 지속성, 그리고 노동자들의 단결성과 투쟁에서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운동으로 기억되고 있다. 헌병대나 군대의 무력시위를 포함한 일제와 고용주의 막강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80여 일을 넘는 오랜 시간을 지속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주목할만한 사건으로 기록된다.총파업은 일본 제국주의가 1930년대 이후 대륙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준비·감행하기 위하여 조선인 기층민에 내던진 탄압에 대한 일대 결전이었다. 총파업과 더불어 일제 경찰은 표면에서는 중립을 가장하면서도 파업 초기부터 모든 집회를 금지하였으며 전단이나 포스터 등은 출판법 위반으로 배포나 게시를 금지했다. 비상경비태세로 들어간 경찰은 의협단이나 소방대원·재향군인 등을 시내 요소요소에 배치했으며 영흥과 고원·안변 등 인근에서 응원경찰관들이 총 끝에 칼을 꽂고 골목마다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총파업이 발발하자마자 ‘내한(耐寒)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군 제19사단 함흥보병대 73·74연대 300명과 400명의 재향군인 및 1,000명의 소방대원이 창검과 철포로 무장하고 시가를 행진하여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총파업을 주도한 지도부의 주요 인물들이 사라지기도 했는데 나중에 이들은 지역 헌병대에 수감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원산매일신문이나 함남시사신보와 국수회(國粹會)·의협단·청년단·자위단 등의 일본인 민간단체도 이에 적극 가담했다. 이처럼 총파업에 대해 전방위 탄압을 가한 것은 조선인 노동자 세력 증대에 대한 일제 자본의 견제와 더불어 제국주의 전쟁을 눈앞에 둔 일제의 전략적 필요 때문이었다. 이에 대하여 오랜 시간 동안 조직의 힘을 키워온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조직하여 파업깨기꾼을 경계하고 일제의 역선전에 대항하여 성명서와 입장문을 발표하면서 스스로의 규율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총파업은 조선은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 차원에서의 국제적 응원과 지지를 받았다. 전국 각지에서 위문원과 조사원이 속속 원산에 도착했으며, 국내외에서 격전과 격문이 빗발처럼 날아들었다. 결과적으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총파업은 당시 유례없는 노동운동이자 민족해방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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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노동자의 원산 노동자 총파업 응원 성명서 (1929)

두 가지 성격과 그 의의 

총파업은 두 가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 정책에 반대하는 민족운동과 더불어 자본과 고용주에 반대하는 계급운동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에 의한 민족운동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식민지 노동운동은 그 자체가 민족해방투쟁일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것은 반일민족해방투쟁이나 반제민족해방투쟁, 혹은 항일투쟁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계급의 시각에서 총파업은 식민지 민중 내부에서 각 사회 계급의 편성과 역할에 주목하면서 특히 민족 부르주아지가 민족해방운동에서 지니는 의미를 강조한다. 총파업이 보인 민족적 성격은 명확하다. 1927년 6월 파업에서 내부 분열로 패배를 경험한 바 있던 자본가 진영은 총파업의 처음부터 조선인 중소자본가를 배제시켰다. 총파업과 관련된 상공회의소 임원이나 쟁의위원에는 절대로 조선인을 가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인 임원이나 운송업자, 회조업자(回漕業者, 해상운송업자) 및 하주 등은 이미 총파업에 대한 대응이 민족적 의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가 하면 원산경찰서의 조선인 간부가 헌병대의 압력으로 교체되었으며 시가지의 일본인들은 조선인에 의한 폭동의 발발을 우려하여 자경단을 조직하여 야경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와 아울러 총파업에서는 중소자본과 대자본 사이에 이해관계의 충돌이 나타났는데 대자본은 일본인이, 중소자본의 대부분은 조선인이라는 점에서 자본의 구분은 동시에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민족 표지와 겹치는 동시에 제국주의·매판자본과 민족자본 사이의 대립을 의미하기도 했다.투쟁 양상에 대한 평가라는 점에서 총파업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이중성격을 갖는다. 한편으로 총파업은 단순한 경제투쟁의 차원을 넘어선 정치투쟁의 양상을 보였으며 이는 주로 노동계급의 역량에 의한 것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비록 경제투쟁의 성격이 있었다 하더라도 반제투쟁의 성격과 요구조건의 적극성, 운동의 추진력 및 당시의 정세 등에서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는 일련의 요인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경제투쟁이라기보다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이 결합된 반제투쟁으로 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총파업이 일본인 감독의 민족 차별과 노동자들의 생존 요구에서 발단했다는 점에 주목하여 조합주의적이고 경제적 성격을 주목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총파업은 ‘한국 근대사상 가장 큰 민족투쟁’, 혹은 ‘완전한 민족항쟁’의 시각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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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노동자 총파업 응원 대연설회 전단

일치된 단결과 연대의 힘 

총파업은 단순히 노동운동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민족독립운동·민족해방운동 부문에 지속하는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노동운동과 민족해방운동에서는 강력한 전국 조직의 필요에서 산별 노조의 건설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광복 이후에 일정한 결실을 맺었다. 합법운동에서 비합법운동의 정치투쟁을 지향하는 민족해방운동을 추동한 사실도 중요하다. 아울러 식민지 반제투쟁에서 민족개량주의가 지니는 기회주의의 본질이 폭로되었다든지, 노농동맹의 결성이나 노동계급의 국제 연대가 강화되었다는 점도 지적되어 왔다. 비합법운동에서 정치투쟁의 문제는 총파업이 일제의 정치적 개입과 탄압에 의한 것이었는데도 총파업의 지도부가 합법 방식으로 일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패배했다는 인식에서 제기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식민지에서 노동운동은 합법과 비합법, 또는 반합법의 모든 활동 양식을 최대한으로 동원한 강력한 반제 정치투쟁의 지향을 보였다. 산별 노조의 건설을 위한 노력은 지역연합체로서 원산노동연합회가 지니는 조직의 결함과 한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자본의 전국 조직과 식민통치자의 전국적 비호를 받는 일본 자본가들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전국 차원에서의 조직과 지도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총파업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일치된 단결과 연대를 통하여 노동계급에 고유한 자율성과 주도성, 일제의 억압에도 절대 꺾이지 않는 투쟁성과 강인성,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낙관의 신념을 보여주었다. 총파업의 기저에 있던 노동계급의 이러한 의식과 활동이 막대한 자본과 일제의 정치 공세에 대항하여 80여 일이라는 오랜 기간을 싸울 수 있게 한 기본 동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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