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난무팅(楠木廳)의 슬픈 역사 속으로

난무팅(楠木廳)의 슬픈 역사 속으로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난무팅(楠木廳)의 슬픈 역사 속으로


아침 7시, 이번 답사단의 구성원들이 인천공항 B카운트에 모두 모였다. 총 4인으로 이루어진 답사단에는 국가보훈처 주무관도 동행하였다. 바람직한 일이다. 뭐든 직접 눈으로 보고 실행에 옮기는 일이 가장 좋지 않은가. 11시 40분, 비행기는 시안(西安) 시엔안(咸安) 국제공항에 사뿐히 안착했다. 두곡진(杜曲鎭)을 답사한 지 2년 만이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선자 부관장이 공항에서 밝은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다시 시작된 실태조사를 앞두고

이번 실태조사의 첫 번째 여정은 시안 두곡진에 세워진 한국광복군 제2지대 기념비정의 촬영이었다. 기념비정은 항상 개방되는 것은 아니라, 방문객이 올 때마다 관리인이 직접 대문을 열어주고 있다. 관람객들의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나 어찌 첫술에 배부르랴? 잘 정돈된 기념비정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우리는 두곡진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시안 시내로 이동한 바로 다음날 창사(長沙)로 출발했다. 시안에서 창사까지는 비행기로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오후 6시 30분이 훌쩍 넘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이번 창사지역 답사의 첫 사적지인 조선혁명당 구지를 포함해 다른 사적지 조사에 대한 최종 점검을 마친 우리는 다음날을 위해 일찍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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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무팅(楠木廳) 안내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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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무팅 입구



난무팅에 얽힌 슬픈 역사

날이 밝아오고 아침 해가 뜨거워지기 전 조선혁명당 구지(舊地), 현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창사) 활동구지 진열관으로 거듭난 곳을 찾았다. 난무팅(楠木廳)을 찾아가는 길은 마치 미로 같았다. 옛 창사의 흔적이 시간을 머금고 그대로 멈춰진 느낌의 골목이었다. 마침내 난무팅에 다다르니 일찍 출근한 관리 책임자 탕민징(唐民景)이 답사단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독립기념관에서 초청되어 교육을 받았던 인지아니(尹佳旎)와 공지아(龔佳)도 밝은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흔히 ‘난무팅(楠木聽)’으로 불린 대한민국임시정부(창사) 활동구지는 2009년 조선혁명당 본부 건물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1938년 초 지청천을 중심으로 한 조선혁명당이 본부로 사용했던 곳으로, 임시정부 요인들과 그 가족들의 거주지였다. 2층에는 조경한과 현익철이, 아래층에는 지청천·김학규·강홍대 등이 지냈다. 난무팅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1938년 5월 7일 이곳에서 김구가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재건파 등과 3당 통합 문제를 논의하다가 반대파에 피격당한 이른바 ‘난무팅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임시정부가 창사로 이전했을 당시 독립운동의 양상에는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이를 민족 해방과 조국 광복의 기회로 판단했다. 우파 계열은 통합 및 단결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을 일으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이루고자 했는다. 이를 위해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조소앙의 재건한국독립당·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세 곳의 합당이 추진되었다. 3당의 합당은 한국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당시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지청천 계열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여 독자노선을 모색하고 있었고, 재건한국독립당 역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혁명당과 재건한국독립당은 재정 여건이 열악하여 김구의 지원이 필요했고, 김구 또한 이들과 연합을 통해 독립운동 세력을 응집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초 난징(南京)에서 각 당의 대표인 송병조·홍진·지청천의 회담이 개최되었다. 이들은 공동선언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강화하는 데 합의하였고, 미주지역 단체들에 지원을 요청함으로써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단체의 재편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마찰이 발생했다. 당시 광복진선은 중일전쟁으로 일제가 난징을 점령하자 창사로 이동하였고, 조선혁명당이 본부로 정한 창사의 난무팅에서 3당이 합당에 대해 회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조선혁명당 간부 출신 이운한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총을 발사했다. 그가 쏜 총탄은 김구를 시작으로, 현익철·유동열·지청천을 차례로 맞췄다. 현익철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고 김구 등은 인근 상아의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중국 경찰은 이운한을 체포하였고, 곧 배후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후에 김구는 『백범일지』를 통해 이 사건에 대해 ‘3당 합당 과정에서 소외감을 느낀 강창제와 박창세 두 사람이 이운한을 이용한 것 같다’고 기록하였다. 슬픈 이야기지만 이것 역시 대한민국임시정부 역사의 한 페이지다. 이러한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날 많은 한국 관광객들이 난무팅을 들렀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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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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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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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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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익철



난무팅에서의 성공적인 답사를 마치며

2009년 개관 이래 해마다 7~8만 명 정도의 한국인이 꾸준히 난무팅을 찾아오고 있다. 창자지에(張家界)에 가기 위해서는 대부분 창사 공항을 경유하기 때문에 이곳 여행사와 지방 관청에서 필수 여행코스 중 하나로 난무팅을 선정해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한국의 독립운동사적지가 중국인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발길이 끊어지면 결국 잊히게 되고, 그 역사는 우리에게서 영영 멀어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 비용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선생님, 전시 내용에 오류가 있네요.” 비디오 촬영을 하고 있던 조성진 연구원이 말했다. 찬찬히 들여다보니 한글 표기에 낯선 부분들이 많았다. 그동안 탕 주임에게 전시 내용에 대해서 수차례 이야기한 바 있는데, 이번에는 아주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우리에게는 광복 70주년이자 그들에게는 승전 70주년인 2015년의 전시 내용을 전면 교체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을 비롯한 한국 관계기관의 많은 관심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진티엔 워먼 이치 츠판바?(오늘 저녁에 함께 식사 가능하시죠?)” 고마웠다. 창사를 방문할 때마다 공동의 관심사를 통해 미래를 설계한다는 취지를 밝히곤 하는데, 상당 부분이 식사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 같다. 우리는 알았다고 답변하고 김구가 피격 당시 이동했다던 창사 상아의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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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무팅 진열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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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무팅 사건에 대한 김구의 편지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