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숨은 공로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BR />한국광복군의 숨은 공로자

글 학예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숨은 공로자
이상정(李相定, 1897. 6. 10~1947. 10. 27)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이상정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이상정은 중국 국민정부에 몸담았던 인물로 항일전선에 적극 참전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광복군 창설에도 기여하는 등 한중연대를 위해 힘썼다.


alt


일본 유학에서 중국 망명까지

대구에서 장남으로 출생,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이다. 이상정의 4형제는 모두 한국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민족시인 이상화가 둘째이며, 셋째 이상백은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 넷째 이상오는 수렵가이자 저술가다.이상정은 1910년대 초 일본 유학으로 역사학·미술·상업·군사학 등을 배웠다. 특히 예비군사교육기관의 성격을 가진 성성중학교에서 수학한 경험은 훗날 그가 중국군에 복무할 수 있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917년경 국내로 돌아온 이상정은 대구 계성학교 미술 교사로 재직했고, 1920년대 초에는 정주의 오산학교와 평양의 광성고보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5년 중국 망명을 결심한 그는 서울 남대문역에서 중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으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망명 이듬해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인 독립운동가 권기옥과 연을 맺어 결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광복될 때까지 내몽고와 베이징(北京)·상하이(上海)·난징(南京)·충칭(重慶) 등 중국 대륙을 다니며 부부이자 동료로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다.   

     

alt

이상정 고택(대구시 중구 계산동 소재)

        

alt

이상정 가족사진(뒷줄 이상정, 앞줄 왼쪽부터

이상화·이상백·어머니 김신자·이상오,

(소남이일우기념사업회 제공)


alt

망명길 기차 안에서 이상정이 작성한 ‘망명가’

(소남이일우기념사업회 제공)


alt

왼쪽부터 이상화·권기옥·이상정(1937년, 권기옥기념사업회 제공)




한중연대 도모를 통한 항일활동

중국으로 망명한 이상정은 중국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항일전선의 선두에 섰다. 1926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과 내몽고에서 펑위샹(馮玉祥) 군 참모부 막료로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중일전쟁 이후에는 중국 국민정부 육군참모학교의 소장교관으로 취임하고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 막료직을 겸하는 등 한중연대에 주력하였다. 또한 민족전선통일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 1937년 조선민족전선연맹의 출발을 주도하기도 했다. 1942년 8월에는 외무부 외교연구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10월 통합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이상정은 임시정부의 통합·개조를 주장했으며, 중국군이 ‘한국광복군 9개 행동준승’을 요구하는 등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제약하려 할 때는 자주적 관점에서 이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상하이로 가서 한인의 권익 보호에 진력하였다. 그러던 1947년 모친상을 당해 9월에 귀국하였으며, 다음달 뇌일혈로 별세하였다. 유고집으로 『표박기(飄泊記)』가 있어 생전 그가 보인 예술가적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정부는 이상정의 공적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alt

중국군 복장의 이상정(권기옥기념사업회 제공)


alt

충칭 육군참모학교 교수 시절 이상정(가운데)과

권기옥(권기옥기념사업회 제공)


alt

제34차 임시의정원 의원 일동(194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