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숨은 역사
발걸음 재촉하는 다채로운 눈요기가 있는 곳
경기도 안성

글·사진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발걸음 재촉하는 다채로운 눈요기가 있는 곳
경기도 안성
계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간다. 봄기운 완연한 4월, 시나브로 새 옷으로 갈아입은 산과 들에서 풋풋한 내음이 풍겨오고 사람들은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을 하고 있다. 이 좋은 날,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화사한 꽃의 향연과 신명나는 놀이판이 있는 안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얼쑤! 흥겨운 남사당놀이 한판
“어흠 어흠, 아따 밤중 가운데 사람이 많이 모였구나.”
“아닌 밤중 사람이야 많건 적건 웬 영감이 남의 놀음처에 난가히 떠드시오.”
안성 시내에서 조금 떨어져 자리한 안성맞춤랜드의 남사당공연장에서 공연이 한창이다. 매주 주말이면 이곳에서 안성시립남사당바우덕이풍물단이 흥겨운 잔치를 벌인다. 남사당놀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광대극으로, 유랑하는 예인들의 민속예능이다. 신명나는 음악과 함께 사회적 메시지를 풍자와 해학을 담아 전달하는 것이 특징인데, 꽹과리와 장구, 징 등 풍물을 쩌렁쩌렁 신명나게 울리며 갖가지 곡예와 재담을 선보인다. 특히 지난 2009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명실공히 안성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남사당놀이는 풍물놀이(농악대)·버나(접시돌리기)·살판(땅재주 놀이)·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이)·덜미(꼭두각시놀음)까지 총 여섯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3m 높이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묘기를 펼치는 ‘어름’은 남사당놀이의 백미다. 어름이라는 단어는 ‘줄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외줄을 타고 덩실덩실 춤추는 줄타기 묘기는 관객들에게 짜릿한 즐거움과 스릴을 선사한다. 둥글고 넓적하게 만든 가죽접시를 담뱃대나 기다란 나무로 돌리는 ‘버나놀이’와 남녀노소 모든 단원이 함께 출연하는 ‘풍물놀이’는 보는 이들의 어깨를 저절로 들썩이게 한다.
안성맞춤랜드: 경기 안성시 보개면 남사당로 196-31 남사당전수관 / 031-678-2672 / www.anseong.go.kr/tour
천재 예인 바우덕이의 뒤를 잇다
남사당놀이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종 2년(1865)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각지의 농악대를 동원해 노래와 춤, 풍물 연주 등 갖가지 재주 부리기로 인부들의 흥을 돋웠다. 당시 유독 대원군의 눈에 띈 인물이 있었으니, 신기의 기예를 뽐낸 ‘바우덕이’였다. 50여 명의 농악대 단원 중 여성은 안성에서 온 바우덕이, 김암덕(金巖德) 단 한 명뿐이었다. 그녀의 나이 15세 때였다.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3품(당상관)을 하사받은 김암덕은 그동안 갈고닦은 모든 기예를 발휘해 경복궁 중건이 마무리될 때까지 인부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바우덕이가 없었다면 경복궁 중건이 제대로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돌 정도로 당시 그녀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러나 타고난 천재 예인은 2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해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안성 남사당놀이는 이렇게 바우덕이의 뒤를 이어 탄생했다.

남사당공연장

바우덕이 동상


독립운동사에 있어 안성은 3·1운동의 3대 항쟁지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919년 3월 11일 보성전문학교 남진우와 선린상업학교 고원근이 학생들을 모아 양성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위를 주도했고, 이후 안성 각 지역으로 만세운동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읍내에서는 안성장터 상인들이 군청과 경찰서 일대를 돌며 시위를 전개했고, 이죽면(죽산면)에서는 죽산공립보통학교 양재욱·안재헌 등이 학생 5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죽면과 삼죽면 주민들은 면사무소와 주재소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3·1운동기념관은 당시의 역사적 현장을 후세에 널리 알리고자 건립되었다. 안성은 경기도 내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지역이기도 한데, 기념관 야외에는 안성 지역 독립운동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한 사당 광복사가 마련돼 있다. 그 외에도 만세고개 기념비, 안성3·1운동 기념탑, 무궁화동산 등을 조성해 그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기념관이 자리 잡은 만세고개 일원은 4·1만세항쟁의 집결지다. 최은식·이유석 등을 주축으로 약 1,000여 명의 주민들이 횃불을 들고 만세고개를 넘었던 그날, 극렬한 만세항쟁으로 일제를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을 이루어냈다. 양성면까지 진출한 이들은 면사무소를 습격해 일장기를 비롯하여 각종 서류와 집기를 불태웠으며, 주재소·우편소·일본인 상점 등을 부쉈다. 일제는 4·1만세항쟁에 대한 보복으로 헌병대를 동원, 시위대를 체포해 잔인하게 고문·살해하고 가옥을 불태우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안성 3·1운동기념관: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만세로 868 / 031-678-2475 / www.anseong.go.kr/tourPortal/41

안성3·1운동 기념탑

기념관 내 재현해놓은 고문방 및 수감방

봄 경치에 둘러싸인 산사
안성 시내에서 진천 방향 17번 국도를 따라가면 의적 임꺽정의 자취가 서린 칠장사가 나온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의적이었던 임꺽정은 백정 신분이었지만 수탈과 억압에 신음하는 민초들을 규합해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의적 활동을 전개했다.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칠장사는 임꺽정의 스승 갖바치가 머물던 곳으로, 홍명희의 역사소설 『임꺽정』에서 조광조가 병해대사(갖바치)를 찾아가 세사(世事)를 논했던 곳이다. 절 뒤편에는 나한전이란 사찰이 있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가는 길에 이곳에서 기도를 드리고 꿈에 시험 문제가 나와 장원급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입시 때가 되면 수험생을 둔 부모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칠장산에 칠장사가 있다면 안성 시내 남쪽 방면에 위치한 서운산에는 청룡사가 있다. 청룡사는 고려 원종 때 명본국사(明本國師)가 세운 절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大藏庵)이란 이름이었다가, 1364년 나옹(懶翁)화상이 중창할 때 청룡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이름을 청룡사로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청룡사는 남사당패의 근거지이기도 하다. 남사당패는 청룡사에서 겨울을 지낸 뒤 봄부터 가을까지 안성장터를 비롯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쳤다고 한다. 청룡저수지 들머리 야산에는 남사당패의 여자 꼭두쇠(우두머리)로 활약했던 바우덕이 묘가 있다. 칠장산과 서운산은 높이가 낮아 가족 산행지로 좋은데, 특히 서운산은 4월 말이면 철쭉이 활짝 꽃을 피워 봄철 분위기가 절정으로 무르익는다. 근처의 청룡저수지는 물결이 잔잔하여 수상스키와 모터보트 같은 수상레저를 즐기기에도 좋다.
칠장사: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 031-673-0776
서운사: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역전길 5

칠장사 대웅전

청룡사 대웅전

안성은 관내에 두루 볼거리가 많다. 칠장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죽주산성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 왜군과 맞서 싸웠던 격전지로 본성·외성·내성 등 세 겹으로 만들어진 돌성이다. 돌을 겹겹이 쌓아 올려 견고하고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있다. 죽주산성은 삼남(충청도·전라도·경상도)과 서울을 이어주는 교통 요충지였는데, 고려시대에는 여러 차례 몽고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천주교 순교성지 중 특히 들를 만한 곳은 미리내성지다. ‘미리내’는 밤이면 달빛 아래 불빛이 은하수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쌍령산과 시궁산이 아늑하게 감싼 3만여 평의 성지 안에는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의 경당과 성모성심당·103위 순교성인 기념관·십자가의 길 등이 있다. 성지를 다 둘러보는 데에는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미리내성지 입구인 난실리 마을에는 조병화문학관도 있으니 함께 둘러보길 추천한다. 꿈과 사랑의 정신을 쉬운 일상의 언어로 표현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조병화 시인은 이곳 편운재에 머물며 많은 작품을 썼다. 마을 사람들을 찬미하는 내용인 ‘우리 난실리’는 기교와 가식이 섞이지 않은 소박한 시로, 지금도 우리에게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이밖에도 안성은 고삼·금광·마둔 등 저수지가 많기로 유명해 낚시터 및 쉼터로 제격이다. 특히 고삼저수지는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영화 <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고삼저수지의 은비늘 호수와 파란 하늘이 빚어내는 절묘한 풍경은 일상의 시름을 달래준다. 이외에 장독 수백 개가 펼쳐진 한옥에서 제철 유기농 밥상을 맛볼 수 있는 서일농원, 낙농체험·승마센터·소 방목장 체험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안성팜랜드도 안성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다.
죽주산성: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 031-678-2502
미리내성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미리내성지로 420 / 031-674-1256 / www.mirinai.or.kr
조병화문학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난실리 산337 / 031-674-0307 / www.poetcho.com

죽주산성

조병화문학관

서일농원


안성에는 무엇보다 다양한 눈요깃거리가 있어 발품 파는 재미가 있다. 하루 이틀 사이에 둘러보려면 열심히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추위는 다 지나갔으니, 이제는 가뿐한 몸만 이끌고 가면 될 일이다.
김초록
여행칼럼니스트 겸 수필가. 현재 『월간 비타민』, 『건설경제신문』, 『서울우유』, 『냉동공조신문』에 객원기자로 활동 중이다. 여행 저서로는 『여름 이야기』, 『7가지 테마가 있는 여행』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