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터전
포츠머스강화회의와
미주 한인의 국제외교활동

글 홍선표 나라역사연구소 소장
포츠머스강화회의와
미주 한인의 국제외교활동
미주한인사회에 국권회복을 위해 각종민족운동 단체가 본격적으로 설립될 때는 전 호에서 언급했듯이 1905년부터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 1905년 5월 러시아의 발틱함대가 동해에서 일본군 연합함대에 의해 대패한 후 미국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가 일어났다. 또한 같은 시기 강화회의에 이어 일본이 보호국화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윤병구와 이승만이 독립청원서를 제출했던 새거모아 힐 전경
1905년 미주 한인의 희망, 러일강화회의
국제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였던 1905년, 미주한인들은 민족운동 단체를 본격적으로 설립하기에 앞서 국제외교활동에 적극 나섰다. 미국의 루스벨트(TheodoreRoosevelt) 대통령이 1905년 7월 2일, 8월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러일강화회의(1905.08.~09.)를 개최한다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중재로 이루어질 러일강화회의 소식에 하와이 한인들은 이때를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간주했다. 때마침 육군장관 태프트(William H. Taft)가 80여 명을 대동하고 동아시아로 가는 도중 7월 14일 호놀룰루에 약 10시간 정도 머무는 일이 일어났다. 그는 루스벨트의 명을 받아 일본 수상 가쓰라타로(桂太郞)와 밀약을 추진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태프트가 호놀룰루에 잠시 체류할 것이라는 소식을미리 안 하와이 한인들은 7월 12일 에와농장에서 긴급 임시공동회를 개최하고 임시 한인 대표로 윤병구를 선출하였다. 임시공동회는 하와이의 김이제(회장)와 김호연(서기), 미국 본토 공립협회의 송석준(총무)으로 구성되었는데 미국과 하와이 간 연합 조직의 형태였다. 따라서 이번 임시공동회는 하와이 측만의 단독 행사가 아닌 미국 본토의 공립협회와 연합해 추진하는 공동 활동인 셈이었다.
윤병구는 하와이 감리교 감독 와드맨(J. W. Wadman)과 하와이 총독 앳킨슨(A.T.Atkinson)의 도움으로 태프트와 접견하고 그로부터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받았다. 그러자 하와이 한인들은 7월 15일 러일강화회의에 파견할 한인 대표로 윤병구를 선정하였다. 영어에 능통했던 윤병구는 당시 기독교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하와이 한인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임시공동회는 윤병구외에 이승만도 한인 대표로 선정하였다. 이승만은 1904년11월 28일 유학차 미국으로 가는 도중 잠시 호놀룰루에 들렀을 때 윤병구를 비롯해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은 바 있었고,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해 공부 중이었다.
윤병구는 1905년 7월 19일 알라메다호를 타고 호놀룰루 항구를 떠나 미국 동부로 향했다. 7월 31일 워싱턴DC에서 이승만을 만난 후 다시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찾아갔다. 윤병구가 미리 준비해 온 독립청원서를 다듬고 거사 진행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윤병구가 준비한 독립청원서는 ‘Petition from the Koreans of Hawaii toRoosevelt(하와이 거주 한인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청원서)’였다. 그 내용은 미 대통령의 중재로 러일강화회의 때에 한국의 주권을 보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윤병구와 이승만은 8월 4일 뉴욕주 롱아일랜드의 오이스트 베이에 있는 새거모아 힐(Sagamore Hill)로 찾아가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났다. 약 30분간의 짧은 접견 시간동안 두 사람은 방문 목적을 설명하고 가지고 간 청원서를 직접 전달하였다. 그런데 루스벨트는 내용을 잠깐 읽어본후 워싱턴DC에 있는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미 국무부로 정식 제출해 달라는 말만 남긴 채 청원서를 다시 돌려주었다. 루스벨트는 윤병구와 이승만이 당도하기 전인 7월31일 자 전보를 통해 태프트와 가쓰라 사이에 체결된 밀약사실을 알고 있었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란 일본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묵인해 주는 대신 미국 또한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일본의 야심에 동의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때에 윤병구·이승만이 1882년 5월 조인된 조미수호조약을 근거로 미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니, 루스벨트는 그 어떤 협조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워싱턴DC 주재 공사관 대리공사 김윤정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던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고 두 사람이 미국 정부에 제출하려는 독립청원서의 접수마저 거부하였다. 이렇게 해서 윤병구·이승만의 국제외교 노력은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윤병구·이승만의 국제외교활동은 성패 여부를 떠나 결코 의미 없는 일이 아니었다. 『뉴욕 타임스』1905년 8월 4일 자와 5일 자, 『워싱턴 타임스』 8월 4일 자,『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8월 18일 자 등 미국의 주요 언론에서 두 사람의 활동과 행적을 자세하게 보도한 것이다. 이러한 보도는 미국 사회에 한국의 주권문제를 국제 정치 화제로 부각시켰다.
첫 외교활동의 실패와 을사늑약
이승만은 학업을 위해 다시 워싱턴DC로 돌아갔다. 하와이로 향하던 윤병구는 1905년 11월 17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머물던 때에 국내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던 중 주미 일본대사의 망언까지 듣게 되었다. 당시 주미 일본대사였던 다카히라 고고로(高坪小五郞)는 현지 신문 기자들과의 대담에서 “한국은 독립이 못 될 나라이다. 이번 ‘을사조약’은 대한제국 정부가 복종하여 평화스럽게 체결된 것”이라고 말했다. 윤병구는 12월15일 샌프란시스코 언론 기자들을 상대로 을사늑약은 일본의 창끝에서 이루어진 강압적인 조약이며 대한제국을 보호국화해야 한다는 일본의 논리는 사실상 대한제국을 강제 합병하기 위한 계책이라고 반박했다.
러일강화회의를 둘러싸고 하와이 한인사회가 보여준 국제외교활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의 한인사회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윤병구와 이승만이 활동하기 이전부터 미일 간의 밀약으로 대한제국을 보호국화 시키려는 일본의 술책과 이를 묵인한 미국의 태도로 두 사람의 외교활동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더구나 대한제국 정부도 일본의 집요한 간섭으로 아무런 대외활동도 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다. 이런 때에 정부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에서 국제외교를 추진한 것은 하와이를 비롯한 미주 한인들의 강렬한 민족의식을 엿볼 수 있는 국권회복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