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만든 사람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굳세게 뭉치어라

뭉치어라 작인들아<BR />뭉치어라 굳세게 뭉치어라
    


글 임영대 역사작가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굳세게 뭉치어라

-서태석(徐邰晳)-


  

서태석은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도(현 신안군)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참한 식민지의 현실을 깨닫고 3·1운동에도 참가했다. 과도한 소작료에서 고향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지주를 상대로 투쟁하여 소작료를 인하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다가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고 그 후유증으로 해방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훈하고 2008년에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암태도의 청년 면장

서태석은 암태도에서 잘 알려진 똑똑한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한의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1901년에 괴질이 유행했을 때는 많은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명석한 그는 28세였던 1912년부터 7년 동안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암태면장으로 일했다. 왕조시대의 관습이 살아있는 식민지 시기, 면장은 어엿한 공무원이자 섬에서 가장 높은 ‘나리’였다. 서태석은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면장’은 오늘날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단순한 공무원이 아니었다. 일제 식민통치기구의 최말단으로 식민정책을 실행하는 앞잡이였다. 총독부에서 내린 지시는 도지사와 군수를 거쳐 면장에 의해 실제 집행되었다. 서태석이 면장을 지낸 지 7년이 되던 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점점 사정이 나빠지는 식민지 현실을 보고, 그해에 면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에 목포에 나가 태극기와 「대한독립 1주년 경고문」을 배포하다가 붙잡혀 1년 동안 수감되었다.


"이 땅은 우리의 땅인데 누가 주인 노릇을 하는가!"


서태석은 석방 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암태도 농민들의 복리를 위해 1923년 8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소작쟁의를 주도했다.


소작농도 사람이다
암태도의 상황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지주들은 통상적으로 수확량의 5할을 소작료로 받았는데, 총독부가 쌀값을 의도적으로 낮추자 암태도 지주들은 소작료를 7~8할로 올려 그 손해를 메우려고 했다. 농민들이 부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요구였다. 이에 암태도 농민들은 1923년 8월,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과도한 소작료를 4할로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다른 암태도 지주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가장 많은 땅을 가지고 있던 친일 지주, 문재철이라는 자가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본격적인 소작쟁의가 시작되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우리들의 부르짖음 하늘이 안다

뭉치어라 작인들아 뭉치어라 마음껏 굳세게 뭉치어라

이 뼈가 닳게 일하여도 살 수 없거늘 놀고먹는

지주들은 누구의 덕인가 그들의 몸에 빛난 옷은 우리의 땀이요

그들이 입에 맞는 음식은 우리의 피로다

봄 동산에 좋은 꽃 지주의 물건 가을밤에 밝은 달도 우리는 싫다


협상이 결렬되자 암태소작인회는 소작료 납부를 거부했다. 문재철은 폭력배를 동원해 소작료 납부를 독촉했고 양측은 여러 차례에 걸쳐 물리적 충돌까지 빚었다. 대립이 길어지면서 일제 경찰까지 개입했다. 경찰은 당연히 지주 문재철을 편들었고, 폭력행위 발생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소작쟁의에 앞장선 서태석을 비롯한 농민들 수십명을 체포했다. 이제 투쟁은 모든 도민의 몫이 되었다.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도 나섰다. 면민대회를 개최해 암태도 주민들의 단합된 의지를 알리고, 목포경찰서와 법원에서 시위를 벌였다. 아사동맹을 맺어 단식투쟁도 전개했다.

섬에서 벌인 투쟁은 섬 안에서 끝난다. 하지만 육지에서 벌인 투쟁은 언론을 통해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전국에서 암태도 농민들에게동조하는 강연회와 모금이 벌어졌고 한국인 변호사들도 재판에 회부된 농민들을 위해 무료로 변론하겠다고 나섰다. 일제 당국은 당황했다. 작은 섬에서 일어난 ‘별 것 아닌 소작쟁의’가 전국으로 확산되어 항일운동의 핵이 될 기미를 보이자 일제가 직접 중재에 나섰다. 8월30일, 목포경찰서 서장실에서 지주 문재철과 농민 대표인 암태청년회장 박복영이 마침내 합의를 보았다. 소작료는 암태도 농민들의 희망대로 4할로 내려갔다. 그동안 쌍방이 진행한 고발은 상호 취하하고, 미납한 소작료는 3년에 걸쳐 상환하며, 문재철은 소작인회에 기부금을 내고, 쟁의 중에 넘어뜨린 문재철 부친의 송덕비는 소작인들이 복구하는 조건이 덧붙었다.

소작쟁의는 이렇게 끝났지만, 서태석의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서태석은 그 뒤로도 서울과 주변 섬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했고, 그러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은 서태석에게 육체적인 상처 외에 정신분열증(조현병)이라는 마음의 상처도 남겼다. 농민들을 위해 애쓰던, 민중을 위한 독립운동가는 결국 암태도 인근 압해도에서 논두렁에 쓰러져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해방을 겨우 2년 남겨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