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립운동가의 초상

억압에 대한 항거
민중의 연대와 투쟁

억압에 대한 항거<BR />민중의 연대와 투쟁
    



글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교수



억압에 대한 항거

민중의 연대와 투쟁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의 외침이 이어졌던 1919년 3월. 역사는 가장 앞에 선 몇몇의 인물만을 기록할 뿐이지만 사실 만세운동의 참여자 대다수는 농민과 노동자, 즉 평범한 우리 민중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절실한 마음으로 만세운동에 힘을 보탰고, 또 누구보다 열렬히 억압과 맞서 싸웠다.




"이 삼천리강토를 일본의 통치에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부득불 우리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독립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으므로 이번 기회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각 약소국가가 독립을 한다 하므로 이러한 행동을 취하게 된 것이다. 수백만 대중이 모두 궐기해서 진력하므로 결국은 목적을 달성하리라 믿으며, 그러므로 절대 독립 사상은 버릴 수가 없다."


만세시위에 나선 노동자와 농민

1919년 3월 17일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서 주재소를 파괴하고 구금자를 탈환하는 데 앞장섰던 농민 조수인의 주장이다. 이처럼 민중은 자신들이 만세를 불러야 독립이 된다는 생각, 그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일본인들을 내쫓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만세시위에 나섰다.

도시의 노동자들도 움직였다. 서울에서는 3월 2일 노동자들이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한 이후 출근을 거부하는 풍토가 생겨났다. 3월 10일 이후에는 평소의 10%에 불과한 노동자만 출근해 공장들이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다. 3월 하순 들어 많은 사람이 검거되며 만세시위가 주춤해지자 노동자들이 나섰다. 3월 22일에는 노동자대회가 열려 노동자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했다. 3월 26, 27일에 전차 종업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거리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처럼 서울만이 아니라 평양, 진남포, 부산, 군산 등 공장이 집중된 도시에서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만세시위를 조직했고 적극 참여했다. 3월 말에 이르러서는 폭력투쟁에 나서는 농민들이 많아졌다. 폭력투쟁은 대체로 시위 과정에서 자행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따른 방어적 조치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계획적이고 공세적으로 폭력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에서는 ‘순사주재소, 면사무소, 우편소 등을 파괴하라, 일본인을 내쫓아라, 여러분은 돌 또는 몽둥이를 지참하여 투쟁하라’는 지도부의 지침에 따라 원곡면과 양성면 시위대가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우편소를 파괴하고 면사무소를 습격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자신들의 삶을 옥죄는 현실을 극복하고자 만세시위에 나섰다. 이름 없는 민초인 그들에게 독립은 자신들을 고통의 나락에서 건져 줄 희망의 빛이었다. 민중에게 스스로 나서서 함께 싸운 3·1운동의 경험은 큰 자산이었다. 이후 농민들은 각종 농민단체를 만들고 소작쟁의를 벌이며 암태도 소작쟁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쟁의를 벌였으며 원산총파업의 역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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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태도 소작인 항쟁 기념탑 (신안군청 제공)




농민의 승리, 암태도 소작쟁의

1923년 가을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도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고율인 소작료의 인하를 요구했다. 서태석의 주도로 암태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소작료 인하를 요구했으나 지주 문재철이 거부하면서 소작쟁의가 발발했다.이듬해 봄인 3월 27일 암태소작인회는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와 함께암태면민대회를 열었다. 이날 지주 측과 소작인 측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면서 소작인회 간부 13명이 구속되었다. 6월 3일 암태소작인회는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와 함께 면민대회를 열어 구속자 석방 운동을 결의했다. 다음날부터 암태도 면민 400여 명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8일까지 철야농성을 벌였다.

결국 구속자 모두가 재판에 회부되자 암태면민 500여 명은 다시 7월 8일부터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마당에서 아사동맹을 맺고 단식투쟁을 벌였다. 암태도 소작쟁의가 점점 확대되자 암태소작인회를 지지하는 전국적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목포 지역 노동단체와 청년단체들은 쟁의자금과 식량을 지원하고 소작농민을 지지 성원하는 여론을 조성해 지주에게 압력을 가했다. 암태도라는 섬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에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에서까지 성원하고 나섰다.

그런데 암태면민들이 6박 7일의 단식투쟁을 마치고 암태도로 돌아온 7월 14일 구속자 13명이 바로 광주형무소로 이송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암태면민들은 분노하며 광주형무소 앞에서 원정시위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그러자 목포경찰서장은 이들을 만류하는 한편, 문재철을 만나 양보를 종용했다. 경찰이 중재에 나선 것은 암태도 소작농민들의 용감한 투쟁 소식이 널리 알려지면서 연대 차원의 소작쟁의가 일어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8월 30일 목포경찰서장실에서 지주인 문재철과 소작인회 대표 박복영이 만나 소작료를 인하하고 고소를 취하하는 데에 합의했다. 소작농민의 승리로 일단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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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을 전개한 원산노동자들(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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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총파업 응원 대연설회 전단



연대의 힘을 보여준 노동쟁의, 원산총파업

1929년에 일어난 원산총파업은 함경남도 원산이라는 지역에서 지역연맹체인 원산노동연합회의 주도로 일어났다. 원산노동연합회는 1925년 11월에 창립했는데, 2,000여 명이 넘는 회원을 가지고 있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결성 직후부터 1927년까지 3년 동안 26건의 파업을 지도하여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 라이징 선 석유회사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이 일으킨 파업이 발단이 되어 일어났다.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은 일본인 감독 코다마(兒玉)가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자 코다마의 파면을 포함한 5개 항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20일간 파업했다. 회사 측은 이에 굴복해 3개월 안에 해결할 것을 약속했다.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조직했고, 원산노동연합회에 가입했다.

1929년 새해 들어 문평제유노동조합은 회사 측이 약속을 지키지 않자 다시 파업을 결의했다. 이때부터 원산노동연합회가 파업을 이끌었다.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단체들이 문평제유회사의 화물을 취급하지 않기로 결의하자 자본가 단체인 원산상업회의소는 원산노동연합회 회원을 고용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1929년 1월 22일 원산노동연합회는 산하 단체의 파업 참여 의사는 해당 단체에 일임하되, 다음날인 23일부터 총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정했다. 그러자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조합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파업에 참가했다. 경찰은 모든 집회와 전단지 배포를 금지했다. 일본인들은 재향군인과 소방대원을 내세워 비상경계를 섰다. 경찰이 증강되었고 군인들도 비상경계에 가담했다. 원산노동연합회는 지구전에 들어갔다. 원산총파업 소식이 국내외에 알려지면서 각지로부터 파업자금이 답지했고 격려 전보와 편지가 쏟아졌다. 각지의 노동조합이나 노동연맹이 파견한 위문단과 조사단도 속속 원산을 찾았다. 멀리 해외에서도 쟁의기금을 보내왔다.

원산이라는 지역을 넘어 전국적·국제적 연대의식이 형성되며 총파업이 주목을 받자, 경찰의 대응은 한층 강경해졌다. 원산노동연합회 산하 노동조합들을 압수수색하고 경찰을 동원해 2,000여 명의 원산노동연합회 회원 가정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식량과 가옥상태 등도 조사했다. 끝내는 원산노동연합회 주요 간부들을 체포했다. 원산상업회의소도 원산노동연합회의 박멸을 주장하며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단체까지 설립했다. 2월 중순이 되자 파업단의 식량이 떨어졌다. 원산노동연합회 소속 노동자들은 금주·금연은 물론 하루에 2끼를 먹는 절약투쟁을 벌였다.

마침내 한국인 자본가들은 원산노동연합회의 요구조건을 승인한 후 노동자의 복귀를 요구했다. 원산노동연합회 역시 한국인 상회와 상점에 속한 노동자에게 복귀를 명령했다. 그런데 장기 파업에 지치고 원산노동연합회의 복귀 명령에 불만을 품은 노동자들이 4월 1일과 3일에 함남노동회를 습격했다. 이를 빌미로 원산에는 무장경관과 기마헌병이 증파되었고 수색과 검거가 잇따랐다. 결국 4월 6일 원산노동연합회는 파업 종결을 선언했다. 암태도 소작쟁의처럼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원산이라는 지역에서 원산노동연합회라는 노동단체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80여 일이 넘게 뭉쳐 싸운 총파업은 유례없는 경험이었다.

암태도 소작쟁의를 이끈 암태소작인회 서태석, 원산총파업의 지도자인 원산노동연합회의 김경식은 조선노농총동맹의 초대 중앙위원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3·1운동 이후 활발해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기반으로 1924년 4월에 탄생한 전국 조직이었다. 조선노농총동맹은 1927년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농민총동맹으로 분화했다. 암태도와 원산이라는 지역에서 일어난 민중운동이 전국적이고 국제적인 주목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을 대표하는 전국 조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