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세히 살피다
삶이 역사가 된 영웅들의 흔적

글 심용환 역사N교육연구소 소장
삶이 역사가 된 영웅들의 흔적
역사적으로 볼 때, 비범한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공간에 남겼다. 독립운동의 역사 속을 온몸으로 살다간 선열들이 후대를 통해 계속 기억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말부터 일제 36년까지 고난의 시절, 전국 각지에서 지역의 경계를 넘나드는 각종 구국운동과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전국에 남겨진 사적지를 통해 그들의 삶을 떠올려 보자.
서울: 한말 구국운동의 중심지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임은 물론 조선왕조 500년의 도읍지이기도 했다. 심지어 일제강점기에도 서울을 중심으로 식민통치가 자행되었기 때문에 어떤 지역보다 당시의 비극과 독립운동의 숨결을 생생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오늘날 낙원상가 일대인 인사동 그리고 북촌을 아우르는 지역은 한말 구국운동의 중심지이다. 이곳에는 1894년 개교한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인 교동초등학교, 흥선대원군이 머물렀던 운현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사실 인사동 일대는 조선시대에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머물던 곳이다. 고관대작의 커다란 집들이 몰려있었고, 조광조·이이 같은 유명한 유학자들이 인사동 골목을 거닐었었다.
급진개화파의 지도자이자 갑신정변을 이끌었던 박영효의 생가(현 경인미술관) 역시 이곳에 있다. 갑신정변 당시 화재로 인해 대저택이 파손되면서 안채만 남게 되었는데, 그마저도 일부는 남산골 한옥마을로 옮겨갔다. 위치상 흥선대원군의 저택과 박영효의 생가가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를 자아낸다. 경인미술관은 헌법재판소 인근을 비롯하여 김옥균·홍영식 등의 급진개화파들이 이곳에 몰려 살면서 의기를 불태웠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북촌한옥마을 전경


운현궁
인천: 국민의 의지로 임시정부를 세운 곳
인천은 부산·군산·목포·통영 등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항구도시 가운데서도 강화도조약 당시 우선적으로 개항되었을 만큼 정치적·경제적 요충지였다.
인천을 대표하는 명소로는 자유공원이 있다. 1888년 만국공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자유공원은 맥아더 공원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실제로 공원의 중앙에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던 맥아더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동상이 세워진 것은 6·25전쟁 이후인 1957년으로, 그때부터 이곳은 맥아더와 인천상륙작전을 기리는 상징적인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자유공원이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은 이외에도 더 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자유공원은 한성정부의 탄생과도 맥을 같이 한다. 3·1운동 이후 바로 이곳에 시민들이 모여 국민대회를 열었고 이 여파로 ‘한성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다.
1919년 4월 세워진 한성정부는 대한국민의회·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더불어 선포되었다. 유일하게 인천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고 직접 민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정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3개 정부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고 최종적으로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한성정부는 정통성을 인정받았다.자유공원은 ‘자유’ 혹은 ‘인천상륙작전’으로만 그 의미가 국한되어 기억되기에는 참으로 아쉬운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현재 자유공원에는 충혼탑을 비롯하여 석정루·연오정 등이 있고 인천 시가지와 항만, 시원한 바다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휴식의 공간으로 제격이다.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천안: 독립을 향한 열망이 들끓었던 곳
흔히 충청도 사람은 말과 행동이 느리고 속을 알 수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독립운동사를 보면 이것이 편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손꼽히는 독립운동가 중에는 충청도 출신이 많다. 유관순과 윤봉길 또한 충청도 사람으로 각각 3·1운동과 한인애국단 홍커우공원 의거의 선봉장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전라도를 기반으로 활동한 전봉준을 도와 마지막 동학농민운동의 열기를 끌어올렸던 손병희 역시 충청도 접주로서 활약한 인물이다. 동학농민운동의 경우 대부분의 사적지가 전라도 일대에 산재하지만, 2차 농민봉기 당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던 우금치 고개는 충청남도 공주에 있다.
현재 천안에는 사적 제230호로 유관순 열사 유적이 있다. 유관순은 이화학당 학생으로 3·1운동 확산을 위해 무던한 노력했으며, 거사를 알리기 위해 전날 밤에는 매봉에 올라 봉화를 올리기도 했다. 마침내 거사 당일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하며 선봉에 섰던 유관순은 동료 30여 명과 체포되었고, 끔찍한 고문으로 끝내 순국했다. 유관순 열사 유적지에는 이를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추모각, 복원된 생가와 기념관 등이 있다. 또한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2월 마지막 날에 봉화를 올리는 행사를 진행해 유관순의 3·1운동 정신을 기리고 있다.

유관순


유관순 동상
안동: 선비에서 동등한 국민의 한 사람으로
경상도에는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산재해 있다.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 등 조선시대 유교 문화의 정수가 모두 경상도에 오롯이 보존되어 있고 부석사처럼 삼국시대부터 내려온 고찰까지 더하면 가히 한민족 역사의 핵심이라고 불릴만한 지역이다. 그간 많은 개발 사업이 있었지만 고택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옮겨 보존함으로써 역사관광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임청각은 고성이씨 종택으로 조선시대 명문가로도 유명하다. 임청각이 인기 많은 관광지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단지 명문가라서가 아니다. 독립운동가 이상룡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경상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 유지에 대한 고집이 강한 곳이었다. 이상룡 역시 처음에는 의병활동에 참여하며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애국계몽운동을 거쳐 1907년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자, 우리 역사 최초로 민주공화정을 표방한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국무령에 올랐다. 전통적인 선비에서 민주공화주의자로 변모했다는 점에서 이상룡의 행적은 특별한 역사로 기록될 만하다.


임청각
광주: 이념의 차이를 넘은 민족운동
광주하면 1980년 5·18광주민주항쟁을 선두로 떠오르는데, 시대적으로 그보다 앞서 광주에 또 하나 잊어선 안 되는 역사가 있다. 바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다. 3·1운동 이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가장 큰 규모로 발생한 민족적 저항운동이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고, 민심은 3·1운동 같은 대규모 만세운동을 준비했으나 이를 예상한 일제의 철저한 차단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이 되어 이 일을 계기로 좌우합작을 이룰 수 있게 되었고, 신간회라는 단체가 탄생했다. 이념을 넘어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신간회는 1929년 광주고보(현 광주제일고등학교) 학생들과 광주중학 일본인 학생들 간의 충돌이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광주제일고등학교는 이러한 광주학생운동의 발생지 중 한 곳이다. 현재 교내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이 있어 후대에 그날의 영광을 일깨우고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제주도: 바다 건너 함께 독립을 외치다
제주도에서도 항일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과 더불어 오래도록 관광지의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이라면 삼별초 최후의 항쟁이라든지 제주 4·3사건 같이 고려시대나 현대사와 관련되어 연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제주도 법정사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나기 다섯 달 전에 항일무장투쟁이 벌어진 바 있다. 일본의 강제 수탈에 맞서 승려 김연일·방동화 등이 중심이 되어 신도와 민간인 400여 명이 일으킨 제주항일무장투쟁은 제주도 최초의 대규모 항일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심용환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팟캐스트 <진짜 역사 가짜 역사>를 통해 재미있고 올바른 역사 이야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CBS와 공동으로 <심용환의 근현대사 똑바로 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헌법의 상상력』, 『심용환의 역사토크』, 『단박에 한국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