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학생들을 이끌고 독립만세 대열에 서다
둘,독립운동에 기여한 무역 왕, 최봉준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김성은 대구한의대학교 교수
학생들을 이끌고 대구3·8독립만세 시위대열에 서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날 신명여학교(신명고등학교 전신)에서는 23세 젊은 여교사가 여학생들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에 앞장섰다. 그의 이름은 임봉선이었다.

신명여학교 초창기 모습


신명여학교 내 신명3·1기념탑(1972년)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받다
이른바 서문시장 만세운동은 대구·경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인 이갑성에 의해 추진되었다. 그는 비밀리에 목사 이만집·조사 김태련·계성학교 교사 백남채 등을 만나 거사 계획을 세웠다. 3월 3일 독립선언서 200매가 이만집에게 전달되었고, 7일에 신명여학교 교사와 학생 등은 평양 숭실학교 학생 김무생과 김천 장로교회 전도사 박제원의 방문을 받았다. 이들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서울과 평양에서 일어난 3·1운동과 여성들의 독립선언운동 참가 상황을 전하면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본적 경북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임봉선은 당시 대구 신명여학교 교사로 학교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었다. 신명여학교는 그녀의 지도 아래 50여 명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임봉선은 남산정 학교 교문을 출발하여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 약전골목 제일교회 근처)으로 향했다. 학생들은 각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그러나 이미 첩보를 입수하고 경찰력을 증원한 남산정파출소가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시위대 선두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임봉선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구만세운동은 3월 8일에 시작하여 10일까지 연 사흘간 계속되었고, 3월 30일에 또다시 일어났다. 특히 만세운동 첫날인 3월 8일에는 무려 천여 명이 모여 대규모로 전개되었다. 그날은 대구의 장날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를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집결지는 큰 장터 소금집 앞 빈터(현 섬유회관 정문 건너편 속칭 동산동 실골목 입구)였다.
학생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앞장서다
거사 장소인 시장에 집결하기 위해서는 잠복한 사복형사들의 감시망을 피해야 했다. 일반 교인들은 모두 장꾼으로 변장하여 시장 안으로 들어갔고, 계성학교·신명여학교·성서학당·대구고등보통학교 등의 학생들은 동산의료원 솔밭 오솔길을 이용하였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동산의료원 솔밭 사이로 흩어져 들어가 거사 장소에 접근했다. 일부 신명여학교 학생들은 빨래하러 가는 척 대야에 헌 옷가지를 담아 들고 버들치 냇가로 내려갔다. 한편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감시를 피하느라 출발이 늦어졌다. 다급해진 학생들은 신작로를 피해 남산동 들판을 가로질렀다. 일부는 계산성당 앞으로, 일부는 동산의료원 솔밭 사이로 흩어져 집결지로 향했다.
오후 3시경 천여 명의 군중이 시장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고창한 후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동산의료원 옆 선교사 거주 지역 사이로 난 좁은 숲길 넘어 현재의 대구백화점까지 진출하였다. 대구만세운동은 당시 남성정교회(현 제일교회)·남산정교회(현 남산교회)·서문교회의 목회자와 교인들, 계성학교·신명여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성경학원의 교사 및 학생들과 수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범시민적 항일독립운동이었다.
평소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했던 동산의료원 언덕 솔밭은 대구만세운동의 중요 비밀 통로 역할을 했다. 이제는 그때의 울창한 솔숲과 작은 오솔길이 사라졌지만, 2003년 ‘대구 3·1운동길’로 명명되어 대구만세운동의 현장을 보존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있다. ‘대구 3·1운동길’은 중구 골목투어 근대문화골목 코스를 따라 동산 청라언덕으로 이어지는 ‘90계단’이 특히 유명하다.
3·1운동 현장이 근대 문화유산으로 계승되다
‘동산’은 대구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James E. Adams)와 동산병원(동산의료원의 전신)을 설립한 존슨(Woodbridge O. Johnson) 선교사가 1899년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매입한 작은 언덕이다. 선교사들은 사택·동산병원·신명여학교·계성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청라(靑蘿)’는 푸른 담쟁이를 가리키는 말로,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들이 푸른 담쟁이 넝쿨에 둘러싸여 청라언덕이라고 불렸다.
신명여학교는 1972년 10월 교내 소공원에 신명3·1기념탑을 건립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이는 지나간 과거사가 아니라 오늘날 학생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교육현장으로 활용하기 위함이다. 정부에서는 임봉선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구 3·1운동길 90계단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독립운동에 기여한 조선의 무역 왕, 최봉준
최봉준은 1862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그는 12살에 아버지마저 잃었다. 친척도, 돌봐줄 사람도 없었던 그는 몇몇 일행과 함께 돈 몇 푼이라도 벌기 위해 일자리를 찾아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간도의 국자가로 갔다. 그곳에 가면 러시아 사람들이 농장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뽑아 데려간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빈손으로 헤맨 러시아에서 만난 행운
우여곡절 끝에 노동자 소개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문을 닫아 러시아인들이 철수한 뒤였다.
“우리가 너무 늦게 왔나 봐. 어떻게든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를 어쩌지?”
“여기까지 왔는데 러시아 연해주로 가는 게 어때? 숲속으로 들어가면 러시아인들의 일터에서 나무 베는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최봉준은 일행과 함께 연해주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추위가 찾아와 숲에서 일하던 러시아인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다. 그들이 머물던 임시 숙소인 오두막은 텅텅 비어 있었다. 최봉준은 낙심한 채 숲에서 일행과 헤어진 후 마을을 찾아 헤맸다. 눈이 쌓여 길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수없이 넘어지며 수십 리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느덧 날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때 숲에서 ‘야린스키’라는 러시아 귀족을 만났다. 그는 최봉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근처 자신의 별장에서 지내도록 했다. 이후 최봉준은 야린스키의 양아들이 되어 7년 동안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했다. 야린스키에게 러시아 말을 배웠고,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지식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야린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의 유언으로 별장과 농장을 물려받았다.
생전 야린스키는 최봉준에게 ‘네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해라’, ‘목표를 분명히 세워라’, ‘할 수 있다고 믿으면 틀림없이 해낼 수 있다’ 등 여러 조언을 해주었다. 성인이 된 최봉준은 그가 남긴 교훈을 떠올리며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조선인이지만 러시아에서 오래 살아 러시아 말을 할 줄 알아. 그리고 러시아 사정에 밝지. 조선과 러시아 간의 무역을 한다면 남들보다 잘할 수 있을 거야.’
무역으로 성공해 독립운동에 기여하다
무역업을 하기로 결심한 최봉준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은 러시아의 이름난 군사 도시였다. 당시 러시아에서 펼친 남하정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군인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러시아에서 달걀을 사 함경도에 파는 일을 하다가, 이윽고 러시아 군대로 눈길을 돌렸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수만 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있어. 이들이 먹어치우는 쇠고기나 군화·군복을 만드는 쇠가죽의 양이 엄청날 거야. 우리 조선의 소를 러시아에 팔아 보자.’ 최봉준은 고향 경흥에서 10여 마리의 소를 사서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군대에 팔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한 무역업은 점점 규모가 커져 수백 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파는 정도가 되었다. 조선에서 소 한 마리를 30원에 주고 사면 러시아에서는 10배로 팔 수 있기에 이윤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마침내 최봉준에게 떼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조선에서 소 전염병이 돌아 소 값이 10분의 1로 뚝 떨어진 것이다. 최봉준은 병든 소들을 싼 값에 사들인 후 수의사를 불러 병을 치료했다. 완치된 소는 러시아로 보내 제값을 받고 팔아 큰 이득을 취했다. 또한 해로를 통해 소를 한꺼번에 많이 실어 나를 수 있도록 일본의 대형 화물선을 여러 척 사들였다. 그리하여 다달이 1천여 마리의 소를 러시아에 팔 수 있었다. 그는 소뿐만 아니라 콩도 러시아에 수출했으며, 광목·비단·석유 그리고 여객 운송까지 도맡으면서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1898년경 함경도 성진항으로 귀국한 그는 ‘국제무역상사’를 차려 해외 각지의 비단과 양목 등을 쌓아 놓고 팔았다. 성진을 중심으로 원산·경흥과 블라디보스토크·부산·홍콩·상하이·일본 등을 잇는 조선의 무역 왕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최봉준은 천만 장자라 불릴 만큼 큰돈을 벌었지만 돈을 헛되이 쓰는 법이 없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젊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고자 했던 그는 러시아 한인 지역에 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조선인들에게 항일정신을 일깨울 신문사를 세워 운영했으며, 러시아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을 돌봐주기도 했다. 특히 1909년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당시에는 안중근의 변호사 비용과 가족의 생계지원에 발 벗고 나섰다. 최봉준은 1906년 러시아 연해주로 돌아갔는데, 안타깝게도 말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