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다

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다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잠들어 있는 역사를 깨우다


8월 29일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들이 드문, 경술국치일의 이른 아침. 햇볕이 없는데도 날씨는 후덥지근했다. 우한(武漢)의 더위를 온몸으로 체감하며 한국독립운동의 젊은 인재를 배출했던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를 찾아 나섰다.






걸출한 한인 청년들을 양성한 우한분교

제2 황푸군관학교로 불린 우한분교는 무창구 해방로에 위치해 있었다. 후난성 우한실험소학교 내에 있어 경비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건물에 들어섰다. 우한분교의 기록에 남아있는 한인청년들의 활동상은 아래와 같다.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는 ‘황푸군관학교 우한분교’라고도 한다. 광저우(廣州)에 있던 황푸군관학교는 국민당 지배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각지에 분교를 세웠다. 광시(廣西)에 난닝분교(南寧分校)·후난(湖南)에 창사분교(長沙分校)·후베이(湖北)에 우한분교 등이다.

우한분교는 1927년 2월 12일 양호서원에 설립되었다. 여기에 특별반이 설치되어 한국학생들을 받아들였고 200명 가까운 한인 학생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입교과정은 분명하지 않지만, 일부 학생들의 명단은 정치과와 포병과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 우한에서는 국민혁명군으로 북벌전에 참가하였던 한인 장교들이 우한분교 학생들과 함께 유악한국혁명청년회(留鄂韓國革命靑年會)를 조직하였다. 그 회원 명단에서 진공목·안동민 등 우한분교 학생 24명이 밝혀졌다. 그들은 졸업 후 국민혁명군 제2 방면군 장빠구이(張發奎) 부대에 배치되어 우한봉기에 참여하였다.

건물로 들어서자 애국교육기지라는 큰 간판과 함께 하늘 높이 치솟은 수목들이 낯선 이방인을 맞아주었다. 입간판에 적힌 설명문을 자세히 보니 2005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2007년에 개관하였다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었다. 우한분교는 2013년 전국중점문물단위로 지정되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국가에서 직접 관리하는 근대문화재로 이해할 수 있겠다. 또한 그해 중국의 정치가이자 소설가인 궈모러(郭沫若)의 자녀들이 방문하였다는 사실도 밝히고 있었다.

실험소학교 내에 있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제법 정돈이 잘된 문화재였다. 임공재 사진작가는 건물 규모가 제법 커서 전체를 찍기 위해서는 주변의 큰 건물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한참을 분주하게 다녔지만 만족할 만한 장소를 찾지는 못한 듯했다. 한국의 젊은 청년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자신들을 단련시켰다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조그만 표지판이라도 부착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작지만 소중한 꿈을 꾸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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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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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


총영사관에서 가진 훈훈한 다과시간

이번에는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를 찾아 나섰다.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라는 사진 속 뒷배경은 사찰이었다. 나이든 중국 어르신들을 통해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허탈했다. 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것이 잊어버린 역사적 공간을 발굴하고 복원하는 일이리라.

이번 답사 일정 중 하나는 주우한 대한민국총영사관 방문이었다. 약속된 시간은 오후 3시, 조선의용대 창설 장소를 찾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여 40분이 지나서야 공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시 한광섭 총영사는 한국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한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의 위상을 잘 알고 있었다. 총영사관 관계자는 간단한 티타임을 하면서 중국 창사(長沙)에 진출한 한국의 철강회사가 한국독립운동 사적지에 해마다 경비를 지원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었다고 말했다. 고맙고 감동스러운 일이 아닌가. 우리는 격한 감동을 주고받으며 이번 답사의 여정과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어쩌면 저마다 독립군의 열기가 이 자리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만큼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다.

답사 일주일이 되어간다. 일행들의 얼굴에 피로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해 이만 일찍 철수하기로 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콩신차이(空心菜)라는 채소를 볶은 요리다. 후베이 사람들은 매운 것을 아주 좋아한다. 오죽했으면 ‘음식이 맵지 않을까봐 걱정된다’는 말이 생길 정도일까. 식사를 간단히 해결하고는 내일 답사할 장소를 점검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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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창설지 추정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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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성립 기념사진(1938년 10월 10일)



중일전쟁을 통해 본 한국독립운동의 희망

다음날 아침. 호텔을 나와 조선민족전선연맹 본부로 차를 몰았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7년 김원봉·김성숙·유자명이 결성한 단체로 주소는 일본조계 813가(현 승리가) 15호였다. 당시에는 일본조계지였던 곳이다. 1937년 7월 7일 이른바 루거치우(蘆溝橋) 사건을 시작으로 전면적인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독립운동 진영은 중일전쟁을 지켜보면서 한국독립운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중요한 기회가 되리라 판단하였다. 전 세계적으로도 반파시즘 통일전선이 확산되었으며, 그에 영향을 받은 중국의 제2차 국공합작이 한국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정세는 독립운동 진영의 협동전선운동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또한 독립운동 진영 자체 내에서도 모든 역량을 결집해 효과적인 항일투쟁에 임하자는 요구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민족주의 우파세력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민족주의 좌파세력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으며, 이로써 양측이 연합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7년 11월 한커우(漢口, 지금의 우한으로 통합)에서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김성숙의 조선민족해방동맹·유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 등 3단체가 단체본위 조직원칙에 의거하여 조직한 민족주의 좌파세력의 연합전선이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과정에서 김성숙은 먼저 무정부주의자 유자명과 통일전선의 조직 방식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할 때, 단체본위 조직원칙에 합의했다. 이는 세력이 약한 소단체의 특성상, 강대한 조직과 연합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보다 유리하기 때문이었다. 반면 김원봉은 기존의 단체를 해체하고 개인본위 조직원칙에 의거한 강력한 단일당 구성을 주장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강력한 조직을 이끌고 있던 김원봉으로서는 자신의 주도하에 단체를 흡수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김성숙은 “당은 함께 못하더라도 우선 연합전선을 펴자”고 주장하였다. 당시 김구의 민족주의 우파계열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로 결집하여 세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김원봉 또한 이와 대등한 좌파 연합체 결성이 시급한 실정이었다. 이와 같은 김성숙의 설득과 김원봉의 양보로 단체본위의 원칙에 의거한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직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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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전선연맹 터


조사된 바 없는 독립운동가들의 옛 터전

조선민족전선연맹은 우한으로 이동한 후 사무소를 한커우 일본조계 813가 15호에 설치하였고, 구성원들 대부분이 그곳에서 합숙하였다. 그 무렵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박차정 부부,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최창익·허정숙 부부,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규광·두군혜 부부, 조선혁명자연맹의 유자명·유칙충 부부 또한 모두 한커우에서 생활하였다. 특별훈련반 한인 졸업생들이 우한으로 온 후,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에는 200여 명에 가까운 조선혁명가들이 집결하였다.

옛 대화가, 현재의 승리가는 잘 정돈되어 있었다. 어설픈 서양식 건물이 들어서 있는 승리가는 차 두 대가 지날 수 있는 정도의 폭이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 본부의 주소 15호를 찾았다. 다만 15호 건물은 없고, 21호로 통합되어 있었다. 3층 규모의 건물, 조선의용대의 창설 주역들은 무엇을 위해 이곳까지 왔을까. 주상복합형 건물로 2층에는 밖으로 대나무를 길게 빼고 빨래를 걸어놓은 모습이 이채로웠다. 누구도 와서 조사하지 않았던 곳, 역사가 잠들어 있는 곳. 이곳에서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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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가 15호 거리 전경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