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 독립기념관 7월호
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

백두산을 넘나들던
독립군 상등병

정갑선


 

글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

 

독립기념관은 2018년부터 독립운동가를 발굴하여 국가보훈부에 유공자로 포상 추천하고 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희생한 분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관심을 담은 것이다. 

2023년 매월 독립기념관이 발굴한 독립운동가를 소개한다.


정갑선(鄭甲善)

본적(출생지) :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동부리 75

생몰 : 1902. 1. 4. ~ 미상

이명 : 정태성(鄭泰成)

포상추천 : 2019년 

포상 : 2020년 순국선열의 날 계기

훈격 : 건국훈장 애국장

운동방면 : 3·1운동, 만주방면


광정단 세 용사의 대승리

1922년 6월 14일 자정 무렵 함경남도 갑산군 동인면 함정포리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광정단(匡正團) 소속의 독립군 김병수(金炳洙), 정갑선(鄭甲善), 한성조(韓成祚) 세 사람이 함정포 경찰주재소를 공격한 것이다. 이들은 함정포주재소에 숙직 중인 이 지역 조선인들에게 악명 높은 일본인 순사 에구치(江口薰)를 사살하고 4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주재소에 보관 중이던 5연발 장총 5자루와 탄환 200발, 권총 1자루, 허리에 차는 칼[佩刀] 2자루, 시계 1개 등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주재소와 동인면사무소 건물을 불태우고, 공문서 일체를 소각하였다. 단 세 사람의 전과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대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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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용사의 대승리」『독립신문』 (1922.08.01.)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태형에 처해지다

정갑선은 1902년 1월 4일 함경남도 갑산군 장평면 동부리에서 부친 정용암(鄭龍岩), 모친 윤용수(尹龍洙)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갑산은 예로부터 ‘사형을 가까스로 면한 중죄인의 유배지’ 중 하나로 유명할 만큼 산세가 험하고 척박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산간벽지인 이곳에도 1919년 3월 만세운동의 소식이 들려왔다. 갑산주민 200여 명은 3월 15일 장평면 서부리 천도교구당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읍내 곳곳을 행진하다가 급기야 군청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혜산진수비대에서는 병력을 파견하여 군중을 강제해산시키고, 주모자 25명을 갑산헌병분대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하였다. 

당시 갑산헌병분대가 있는 동부리에 살고 있던 정갑선은 하루 종일 헌병분대에서 새어 나오는 비명을 들으며 울분을 삼켰다. 이에 4월 10일 자신의 모교인 갑산공립보통학교 기숙사에 친구, 후배 10여 명을 모이게 하였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이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며 마을 어른들의 뜻을 이어 다시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 발각되었다. 정갑선은 6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의 죄명으로 회초리[笞] 90대에 처해졌다. 

일제에 의해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조선인 남자에게만 언도되던 회초리 형벌, 즉 태형(笞刑)은 하루에 30대까지만 제한하여 집행할 정도로 가혹한 전근대적 형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만에 달하는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감옥에 모두 수용할 수 없던 조선총독부는 태형을 남발했다. 그 결과 수만 명이 태형에 처해졌고, 그중 절반 이상이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정갑선이 태형의 여독에서 가까스로 회복할 무렵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그를 간병하던 모친이 돌아가신 것이다. 그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지만 포기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였다. 


단군 자손 우리 소년. 국치민욕을 네 아느냐?

백두산에 칼을 갈고 두만강에 말을 먹여

앞으로 가! 하는 소리에 전승고를 울려라


- [복수가]의 일부


시간이 지나자 3·1만세시위의 열기는 점차 가라앉았다. 그러나 독립에 대한 의지는 민족운동의 열정을 경험한 수많은 사람이 모여 더욱 높아져 갔다. 일부는 국내에서 비밀리에 활동을 시작했고, 또 다른 일부는 국경을 넘어 만주로 들어갔다. 이미 만주로 건너가 터전을 잡아 형성된 한인사회를 근거로 하여 항일무장투쟁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이들 무장단체는 접경지인 함경남도를 주된 활동무대로 하여 독립운동자금을 구하거나 일제 관공서를 공격하였다. 이들의 기세가 어찌나 맹렬했던지 당시 갑산군수 윤자록이 ‘독립군의 협박장을 받고 두려워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잠도 못 자더니 미친 사람처럼 헛소리하게 됐다’는 소문도 퍼졌다. 뜻있는 젊은 청년들은 앞다투어 만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정갑선은 1921년 10월 중국 장백현으로 건너가 조선독립군비단(朝鮮獨立軍備團)에 입단하였다. 군비단은 일본의 침략주의에 대항하여 최후일각까지 투쟁할 것을 목적으로 하여 우선 조선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가르쳐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한편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정갑선은 군사훈련을 받는 한편 신정학교(新正學校)에서 한문교사로 근무하며 조선인 아동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같은 해 12월 그는 갑산군 동인면 조선인 부호의 집을 습격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는 첫 임무를 완수하며 독립군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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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현 17도구 군비단 활동지

독립군 상등병 정갑선의 활약

1922년 군비단은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던 대진단(大震團), 태극단(太極團) 등과 통합하여 광정단(匡正團)으로 발전하였다. 광정단의 상등병이 된 정갑선은 동지들과 함께 갑산군으로 침투하였다. 6월 12일 갑산군 동인면에서 조선인 부호 김하룡, 오형준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고, 15일 함정포주재소와 동인면사무소를 공격하여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전과를 올렸다. 같은 날 쉴 틈도 없이 갑산 최고의 부호 김의봉의 집을 습격하였다. 독립군이 조선인 부호를 공격한다는 소문을 들은 김의봉은 일본인 순사 4명을 동원하여 자기 집을 지키게 하였는데, 정갑선과 그의 동료들은 교전을 벌여 그들을 모두 사살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7월 28일 정갑선은 30여 명의 대규모 병력과 함께 함경남도 혜산군의 포태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들은 3분대로 나뉘어 각지에서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한 후 돌아가던 길이었다. 근거지를 오랫동안 떠나있던 탓에 짚신이 다 해져서 거친 산길을 이동하기 어려웠던 그들은 27일 오후 4시경 한 명을 민가로 보내 짚신을 구하게 하였는데 그만 일본 순사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포태주재소에서는 인근 경찰서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 수색작전을 펼쳤다. 이로 인해 주재소 경비가 허술해졌다는 정보를 접한 단원들은 지름길을 통해 주재소를 역공격하여 남아있던 순사 3명 중 두 명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총소리를 듣고 돌아온 수색대와 3시간에 걸쳐 교전을 벌였다. 순사들이 발사한 탄환이 400발에 달할 정도로 격렬한 전투였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단원 한 명이 순국하였으나 나머지는 총 5자루와 탄환 3천여 발의 전리품을 가지고 무사히 돌아갔다. 

정갑선은 이후로도 삼수군 호인면 영성주재소를 공격하고 인근 전봇대 30여 개를 도끼로 찍어 일본군의 통신망을 단절시키는 등 국경을 넘나들며 활발히 활동하였으나, 1924년 피체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12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두 번의 감형을 거쳐 1930년 11월 27일 출옥한 정갑선은 노부 혼자 남아있는 고향 갑산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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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태산에서 대격전」『동아일보』 (1922.07.30.)(좌), 「국민단원 정갑선 12년을 불복공소」『시대일보』 (1924.10.28.)(우)

무명 독립군의 발자취를 찾아서

이름도 없이 잊힌 독립군이 너무도 많다. 다행히도 정갑선의 경우 『함흥지방법원 이시카와 검사의 3.1운동 관련자 조사자료』에서 만세운동 행적을, 「가출옥관계서류」를 통해 군비단과 광정단에서의 활동 내용을 확인하여 그 치열했던 삶을 복원할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 자료발굴TF팀은 2019년 정갑선을 포상 추천하였고, 그 결과 202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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