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30일
’의주학살사건’의 전말과 의의
글 이용철(충북대학교 박사)
‘의주학살사건’은 1919년 3월 30일, 평안북도 의주군 영산시장에서 약 3,000~4,000명이 참여한
의주지역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나자 일제가 야만적 탄압으로 만세 군중 15명을 살상한 사건이다.
의주지역의 3·1운동을 대표하는 사례이며,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극명하게 표출했다는 점에서
전체 3·1운동사를 통틀어서도 괄목할 만한 사건 중 하나이다.
사건의 배경
1919년 일어난 3·1운동은 일제강점기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서 국내외 요인이 결합하여 발생한 대사건이었다. 한국인은 대한제국기(1897~1910) 때부터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항쟁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왔고,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뒤에도 각종 비밀결사 활동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런 노력과 열망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인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더욱 커지게 되었다.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에게 적용될 수 있는가는 둘째치고, 국내의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계획·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1919년 3월 1일, 경성(서울) 태화관에 손병희를 필두로 하는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모여 독립을 선언한 가운데, 같은 시각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도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운동에 나서면서 3·1운동이 본격화하였다. 이후 3·1운동은 「독립선언서」 전파와 함께 전국으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한편 ‘의주학살사건’이 일어난 평안북도 의주는 한강 이북 3·1운동의 중심지였다. 의주 역시 서울과 마찬가지로 3월 1일만세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유여대 목사가 의주지역의 3·1운동을 사전에 준비하였기 때문이다. 유여대는 2월 10일 선천군 평양노회에서 이승훈·양전백 등과 만나 3·1운동 참여를 논의했고, 같은 달 17~18일경 정명채·김두칠 등과 의주군 3·1운동을 준비하였다. 그 결과 3월 1일 오후 2시, 의주면 읍내 기독교 교회당에서 의주지역의 3·1운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의주에서는 ‘의주학살사건’이 발생한 3월 30일 전까지 무려 27회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영산시(永山市)에 이사(異事)」, 『독립신문』 (1920.4.20.)(좌), 「소요사건(騷擾事件)의 후보(後報), 평안북도 의주(義州), 의주 영산에서, 중상자 육 칠명」,『매일신보』 (1919.4.5.)(우)
사건의 전말
1919년 3월 30일 정오 12시경, 고령삭면 구창동에 위치한 영산시장에서 장날을 맞아 약 3,000~4,000명이 참여한 의주지역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최초 운동은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의 연대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일제는 운동을 조기에 종식하고자 재빨리 탄압에 나섰다. 영산시장 내 헌병주재소 헌병 2명과 헌병보조원 3명을 2개 조로 나눠 투입, 만세 군중의 진압에 나선 것이다. 이미 3·1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째에 접어든 가운데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크게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였다.
하지만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일제 헌병과 보조원을 포위한 가운데 만세운동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헌병 한 명이 총을 쏘면서 시위대를 위협했지만,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고 헌병의 총을 빼앗는 데 성공하였다. 이때 총성을 듣고 또 다른 헌병이 달려왔으나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이들도 만세운동에 참여한 시위대와의 몸싸움 속에서 총을 빼앗겼다. 두 명의 헌병이 몸싸움 끝에 총기를 빼앗기고 부상을 입자 남은 헌병보조원 3명은 잔혹한 탄압을 시도했다. 무려 60여발의 실탄을 시위대에게 난사한 뒤 앞서 부상을 당한 헌병 2명을 데리고 주재소로 물러났다. 일제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이후 탄약 상자를 갖고 주재소 뒤편으로 도망쳤는데, 이 과정에서도 군중을 향해 총을 난사하였다.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은 일제 헌병·헌병보조원의 무차별 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럼에도 꿋꿋하게 만세운동을 하면서 독립의지를 만방에 떨쳤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와 헌병보조원 숙소에 돌을 던져 문과 창문 등 집기를 파괴하고, 병기고에 보관 중이던 총기 등도 압수하였다. 이후 치열했던 만세운동은 일제의 탄압 병력이 추가로 파견되면서 오후 7시 30분경을 기해 점차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이날의 독립만세운동으로 시위대 측에서는 7명이 총에 맞아 순국하였는데, 「영산시(永山市)에 이사(異事)」, 『독립신문』 (1920.4.20.) 기사에 실린 순국자 5명의 이름을 보면 장인국·김석운·황수정·허창준·백성아 등의 이름이 확인된다. 일제는 이들 사망자를 포함한 사상자를 최대 15명으로 집계하였고, 기타 41명의 참여자를 체포하였는데 이들 중 공판에 부쳐진 6인은 구체적인 신상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고령삭면에 거주하는 농민들이었는데, 보안법위반과 소요죄 등의 죄목으로 길게는 징역 3년부터 짧게는 징역 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체포된 이들 중에는 공판 과정에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저항을 이어간 인물이 있었다. 박병수가 대표적인데 그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강제 병합을 비판했으며,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선포된 것에 고무되어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하여 기쁘게 만세를 불렀다고 하면서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참여를 정당화하였다.
의주 3·1운동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
‘의주학살사건’이 발생한 영산시장 만세운동의 성격과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먼저 만세운동은 장날을 맞아 시장에서 일어났고, 그로 인해 4,000명 이상의 대규모 군중이 만세운동에 동참할 수 있었다. 실제 3·1운동과 관련하여 대규모 시위는 대개 장날 시장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영산시장 3·1운동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와 함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참고로 의주는 3·1운동 당시 전국에서 기독교와 천도교세가 가장 강력한 곳 중 하나였는데, 바로 이 점이 일제의 학살에도 많은 군중이 결집할 수 있도록 했던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만세운동이 일어난 시점도 중요하다. 3월 말에서 4월 초는 전국적으로 3·1운동이 가장 활성화된 시점으로, 2,000명 이상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가장 많이 발생하던 때였다. 의주군 역시 3월 1일부터 만세운동이 일어나긴 했지만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운동의 발생 빈도가 줄고 있었는데, 3월 말에 가면서 전국적 추세에 부합하여 4,000명 이상이 참여하는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으로 승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의주학살사건’이 발생했다.
결국 ‘의주학살사건’은 의주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천도교계 인사들이 장날을 맞아 영산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이것이 대규모 시위로 촉발된 가운데 일제의 거센 탄압 속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굴하지 않고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떨친 평안도의 대표적 독립만세운동이었던 셈이다. 특히 의주는 기록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최소 40회 이상의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곳으로 단일지역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따라서 의주에서 발생한 ‘의주학살사건’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의주학살사건’과 같은 지역의 대표적 만세운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3·1운동의 거대한 역사적 물결이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이자 대한민국의 전신으로서 상징성을 갖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귀결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의주학살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