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최초의 전국여성단체 YWCA 설립자 김필례
둘, 콜레라 환자는 얼음 속에 얼려 죽인다?

하나,최초의 전국여성단체 YWCA 설립자, 김필례<BR />둘,콜레라 환자는 얼음 속에 얼려 죽인다?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하나]

글 윤정란 서강대학교 연구교수


최초의 전국여성단체 YWCA 설립자, 김필례


김필례는 1891년 12월 19일 10번째 자녀로 태어나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개화된 집안 분위기 덕에 일찍이 근대교육의 수혜를 받았다. 김필례를 비롯해 김필순·김순애·김마리아·김염 등 그녀의 가문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나 민족지도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근대교육 수혜로 여성문제를 자각하다
김필례는 고향인 황해도 재령 성경학교에서 수학한 후 1907년 6월 정신여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다. 1908년까지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그해 9월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東京)여자학원 중등, 고등부를 마치고 영화(英和)음악전문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 후 1916년에는 정신여학교, 1918년 결혼 후에는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는 등 여성교육 보급에 앞장섰다.


YWCA 설립으로 여성운동을 이끌다
YWCA와의 인연은 일본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방학을 맞이해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기가 곤란해진 김필례는 일본 YWCA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곳은 성경을 이론으로만 가르치지 않고, 생활 속에서 성경을 실천하고 있었다. 그녀는 귀국하면 반드시 한국에도 이러한 단체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이 계획을 세우게 된 데는 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일본 YWCA 총무 가와이 미치코(川井道子)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은 까닭이었다.
미치코는 선생에게 곧잘 일본이 폭력수단을 동원해 약속국인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있는 행위는 세계인의 규탄을 받아 마땅한 야만행위이며, 일본은 우리나라를 강점해서는 안 된다고 늘 말했다. (중략) 이 단체는 좋은 단체구나 생각하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단체를 꼭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김필례는 귀국 후 YWCA를 조직하려 했으나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1920년 12월 미국 YWCA 세계부가 설립을 돕기 위해 위원단을 파견했으나 성과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듬해 그녀가 정신여학교 교장 루이스를 찾아가 YWCA 설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교장은 이화학당의 당장 아펜젤러(Alice R. Appenzeller)를 소개해주었고, 그녀로부터 김활란을 소개받음으로써 YWCA 조직에 대한 논의를 가속화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22년 3월 남녀 인사 30여 명이 모여 제1차 발기회가 개최되었다. 준비위원은 회장 유각경, 위원 김미리사·김필례·김살로매·김경숙·방신영 등이었다. 4월에는 베이징(北京) 칭화(淸華)대학에서 세계기독학생대회가 개최되었다. 한국여성 대표로 김활란과 함께 참석한 김필례는 대회 동안 우리나라 YWCA 조직에 필요한 정보 및 지식을 얻고자 했다. 그러나 문제는 한국만의 독립적인 YWCA를 조직하려면 일본 YWCA의 양해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가와이 미치코와의 만남도 쉽지 않았다. 미치코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지한 김필례는 비서에게 3·1만세운동 당시 일본의 만행을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폭로하겠다고 위협했다.
“나를 일부러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태도에 난 불쾌감과 모멸감을 느껴요. 그렇다면 좋습니다. 가와이 총무와 의논 없이 대회 의장을 통하여 수원 제암리교회 사건을 세계 각국 대표들에게 폭로하겠소. 잔인무도한 일본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리려는 거요.”
떠드는 소리에 가와이가 밖으로 나오자, 그녀는 가와이에게 세계 YWCA 가입 시 독립된 대표권이 있는 조선 YWCA로서 가입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했고 긍정적인 대답을 받아냈다.
귀국 후 김필례는 지방조직을 위해 전국 순회강연을 다녔는데, 1922년 11월부터 40여 일간 전국 17개 지역을 찾아다녔다. 이를 배경으로 1923년 8월에는 5개 도시와 11개 학교 대표 70여 명이 모여 YWCA를 설립했다. YWCA는 국제적인 문화교류와 친선·금주금연운동·생활개선운동·공창폐지운동·물산장려운동·지방여성 및 여학생을 위한 기숙사 설치·농촌계몽·사회사업 등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이어 1924년 5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세계 YWCA 임원회에서는 조선 YWCA가 회원국으로 승인됐다. YWCA는 1923년 설립된 이후 세계 회원국들과 세계적인 관계망을 통해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뿐 아니라 한국의 문제를 세계에 알리고 지지를 얻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필례는 여성교육운동에 계속 매진했다. 정신여학교 교무 주임으로 재직하다가 1925년 다시 미국 유학을 가 각종 여성운동 관련 대회에 참석하는 등 세계사적 안목을 넓혔다. 귀국해서도 인도 마이쏠 세계기독교학생대회 대표로 참여하는 한편 여성교육에 헌신했다.


지구촌 문제는 국제적인 연대와 지원으로 해결하자
김필례는 광복 이후에도 여성 대표로서 계속 활약하면서 1950년 4월부터 1959년까지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대회 회장을 지냈다. 1950년 7월부터 1951년 7월까지 미국 오우션 클럽 세계연합장로회 여전도회 4년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 미국 19개주를 순회하며 강연하기도 했다. 1961년 7월부터 정신여자중고등학교 명예교장·정신학원 이사·정신학원 이사장 등을 지냈고, 1972년에는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김필례는 국제적인 연대와 지원만이 갈등과 증오로 팽배한 현실모순을 타개할 수 있다는 점을 YWCA 활동에서 체득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묵묵히 ‘자기소임’에 충실한 그녀의 인생 여정은 오늘날 대한민국을 만든 진정한 밀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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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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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필례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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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YWCA 제2회 하령회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 둘]

글 신현배 역사칼럼니스트


콜레라 환자는 얼음 속에 얼려 죽인다?


1920년 서울에는 콜레라가 유행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해 8월 16일 오후 6시, 종로 4가 파출소 앞에서 일본 순사 몇 명이 조선 사람 한 명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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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데려가려는 일본 순사를 거부한 이유

“멀쩡한 사람을 왜 붙잡아가는 거야? 난 들것이 싫어. 날 병원에 데려가려면 같이 걸어가.”

“환자를 걷게 할 수는 없다. 어서 들것에 타라.”

조선 사람은 인의동에 사는 최영택이라는 사람으로, 콜레라 환자로 확인되어 일본 순사들이 그를 들것에 실어 순화병원으로 데려가려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콜레라 환자가 생기면 병원으로 끌고 가 격리 수용했다. 그러나 최영택은 들것에 실려 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었다. 그가 일본 순사들과 옥신각신하는 동안 주변에는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이 600~700여 명에 이르렀다.

“멀쩡한 조선 사람을 왜 병원에 끌고 가려 하느냐?”

“병원에 가면 죽는다. 열이 많이 나는 콜레라 환자라면서, 열을 식힌다고 얼음 속에 넣어 얼려 죽인단 말이야. 이제까지 죽인 사람이 수백 명이 넘어.”

흥분한 사람들이 소리치며 일본 순사들을 향해 돌을 던지자, 겁을 집어먹은 순사들은 최영택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동대문 경찰서에서는 콜레라 환자를 가정집에 둘 수 없다며, 이튿날 오후에 다시 일본 순사들을 보내 최영택을 병원으로 끌고 가려 했다. 그는 절대로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일본 순사들은 그를 강제로 결박한 뒤 순화병원으로 연행했다.

최영택이 광화문 네거리에 다다랐을 때였다.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일본 순사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사들을 쫓아버리고는 최영택을 탈취하여 세브란스병원에 데려다 주었다. 진짜 콜레라에 걸렸는지 진찰을 받게 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검사 결과가 나오려면 일주일은 기다려야 했다. 결국 최영택은 그날 밤 순화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본 순사들이 돌림병 환자를 끌고 가, 순화병원에서 얼음 속에 얼려 죽인다고 믿었다. 더욱이 콜레라는 일본 사람들이 갖고 들어온 병이라 생각해 반감을 가졌던 터라,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는 조선 사람을 보면 군중들이 모여들어 거세게 항의하고 돌까지 던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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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관련된 터무니없는 소문들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사람들을 증오하고 있었기에, 한말에는 우두(牛痘)가 일본에서 건너왔다고 해서 우두를 맞으면 소처럼 미련하고 온순해진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일본이 조선 민족을 소처럼 만들려고 살을 찢고 우두를 놓는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이 사실을 알고 우두를 맞으려 하지 않기에, 일본 사람들은 철부지 아이들에게만 우두를 놓는다는 얘기가 퍼졌다.

한편, 콜레라가 크게 유행한 것은 1895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콜레라에 걸려 떼죽음을 당했다. 당시 쥐가 콜레라를 전염시킨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쥐 귀신이 사람 몸속에 들어와 콜레라를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병이 나으려면 몸속에 있는 쥐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여겨, 대문에 고양이 그림을 붙여 놓았다. 쥐 귀신이 고양이 그림을 보고 무서워 달아나라고 말이다. 때로는 고양이 귀신 대신 고양이 가죽을 대문에 걸어 놓기도 했다.

이런 원시적인 민간요법은 학질 환자에게도 사용되었다. 몸에 붙은 학질 귀신을 놀라게 해야 떨어져 나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질 환자를 절벽 위에 앉혀 놓고 갑자기 뒤에서 등을 쳐 놀라게 하는 것이 치료의 일환이었다. 1925년 7월 8일에는 왜관에서 학질 환자를 기차가 지나가는 철교 밑에 새끼줄로 매달아 놓은 사건도 있었다.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학질 귀신이 떨어지라고 말이다.

이렇듯 당시에는 질병과 관련해서 터무니없는 소문들이 널리 퍼져, 근거 없는 치료법이 흔하게 이루어지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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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배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역사칼럼니스트. 저서로는 역사 이야기 『엉뚱 별난 한국사』, 『엉뚱 별난 세계사』, 『2000년 서울 이야기』, 『세계사로 배우는 법 이야기』, 전통문화 이야기 『소중한 우리 문화 지식 여행』 시리즈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