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글 학예실
아들아! 나라를 위해 떳떳하게 죽으라
조마리아(趙姓女, 1862. 4. 8~1927. 7. 15)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조마리아를 7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그녀는 안중근 등을 독립운동가로 길러낸 위대한 어머니이자, 스스로도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이다.

독립운동가의 어머니
조마리아는 황해도 해주군에서 태어났다. 안태훈과 혼인했으며 1897년 뮈텔 주교에게 영세를 받고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았다. 슬하에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장남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의 독립군단들을 통합해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한인애국단에 참여하였고, 딸 안성녀는 중국에서 독립군 활동을 지원하였다.
자녀들이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조마리아의 가르침과 지지 덕분이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안중근은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여 의연금 모집에 앞장섰다. 조마리아도 1907년 5월 평안남도 ‘삼화항 은금폐지부인회’의 제2차 의연활동에서 은장도·은가락지·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헌납했으며, 다른 이들에게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한편 안중근이 해외망명을 앞두었을 때에는 “집안일은 생각하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고 격려했다. 1909년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사형을 언도 받자,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마지막 당부의 말을 전하며,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을 통해 수의를 지어 보냈다. 조마리아는 그렇게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고 남은 가족들과 함께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조마리아

남편 안태훈과 아들 정근, 공근

조마리아가 지은 수의를 입고 있는
순국 직전의 안중근

조마리아 의연 소식(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29일자,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해외망명과 독립운동 지원
안중근 의거 후 조마리아는 1910년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처음에는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정착했다가 1914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안정근은 대규모 농장을 개척해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고자 했으며, 조마리아 역시 자녀들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20년 1월 31일자 『독립신문』 보도에 따르면 그녀는 쉬는 날 없이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했다고 한다. 또한 그해에 안정근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떠나자, 조마리아도 뒤따라 1922년 상하이로 이주하였다. 그녀는 안중근의 어머니라는 위상과 독립운동에 대한 헌신으로 동포들의 높은 신망을 받았다.
1926년 안창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제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임시정부경제후원회’를 창립했다. 후원회는 모든 회원들로부터 법정세금을 받고 매년 1인당 1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조마리아는 임시정부경제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후원회를 이끌었고, 어려운 경제적 여건 속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조마리아는 1927년 7월 15일 상하이에서 위암으로 별세했다. 정부는 그녀의 공적을 기리어 2008년 8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니콜리스크에서의 조마리아와 가족들의 삶을 전한 기사
(독립신문 1920년 1월 31일자)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 기사
(동아일보 1926년 7월 28일자)

조마리아 회갑기념사진(1922년 니콜리스크, 국가보훈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