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열의 발자취를 찾아서

무더위 속에서 영광의 시간을 찾다

무더위 속에서 영광의 시간을 찾다

글 김주용 독립기념관 선임연구위원


무더위 속에서 영광의 시간을 찾다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한 우리는 다음날 아침 창사 남역에서 우한(武漢)까지 가는 고속열차에 올랐다. 350km로 달리는 고속열차는 한 시간 반 만에 우리 일행을 후베이성(湖北省) 우한에 무사히 안착시켰다.

           



한여름 더위가 유명한 우한에서의 첫 답사

우한(武漢)은 충칭(重慶)·난징(南京)과 함께 3대 화로로 알려진, 중국에서 가장 더운 지역 중 하나다. 이번 우한 답사에서는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와 창설 장소를 찾는 데 집중했다. 몇 해 전 흥행한 영화 <암살>의 주인공들이 바로 의열단원들이며, 이들이 성장해서 조직한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대이다. 중국 국민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성립된 조선의용대 창설이 내년이면 80주년을 맞이한다.

일행은 재빨리 짐을 내려 준비된 승합차로 향했다. 선하게 생긴 중국인 기사가 반갑게 맞아 준다. 차는 우한 답사의 첫 번째 목적지인 여황피로(黎黃陂路)의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로 향했다.        


alt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

alt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 거리 표지석



조선의용대의 탄생 배경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한국이 독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인식하였다. 이에 따라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각 단체들 사이에 연합전선 문제가 대두되었다. 결국에는 민족주의진영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와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민족전선연맹이 형성되었다. 그 중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조선민족전선은 무장부대의 조직과 대일항전 참여를 목표로 하였다. 조선민족전선은 1938년 7월 중앙군사학교 성자분교 졸업생들이 민족전선 본부가 있는 한커우로 합류해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장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1938년 7월 7일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선의용군 조직을 정식으로 건의하였다. 이 제안은 장제스의 재가를 거쳐 모든 항일세력의 연합을 전제로 하고, 규모상의 문제로 무장부대를 ‘군(軍)’보다는 ‘대(隊)’로 할 것과 조직될 무장부대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승인되었다.

1938년 10월 2일 한국 및 중국 양측 대표들은 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의용대 지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지도위원회는 군의 명칭·조직 인선·편제·활동경비 등을 결정했으며, 건립 후에는 의용대를 지도하는 기구로 작용했다. 지도위원회 위원으로는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 측 인원 4명과 조선민족전선 산하 단체의 대표 김원봉·김성숙·김학무·류자명 등 4명이 선정되었다. 이러한 결과 조선민족전선은 그해 10월 10일 한커우(중화)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42년 한국광복군에 편입될 때까지 중국군 ‘6개 전구 남북 13개 성 전지’에 배속되어, 주로 일본군 포로 심문이나 대일본군 반전 선전, 대중국민 항전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의용대의 발대식은 1938년 10월 10일 중화민국 쌍십절(雙十節)에 거행되었다.


alt

조선의용대 대원들

alt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김원봉



역사적인 순간을 짐작하다

발대식 당시 관련 자료는 서류로 전해진 것이 없다. 다만 발대식에서 찍은 기념사진에는 ‘ㅈㅗㅅㅓㄴㅇㅡㅣㅇㅛㅇㄷㅐ’라는 한글자모와 ‘KOREAN VOLUNTEERS(조선의용대)’라고 영문으로 쓰인 대기(隊旗), 그 뒤로 대장 김원봉의 모습이 보였다. 사진 속 인물은 90명으로, 군복을 입은 대원이 74명이고, 양복 또는 중산복(中山服)을 입은 자가 14명이다. 긴치마를 입은 여성 2명도 눈에 띄었다.

대원이었던 김학철의 회고에 의하면, 이 사진은 1/4 정도가 잘려나간 까닭에 대원 30여 명의 모습이 누락되었다고 한다. 대장 김원봉을 중심으로 맨 앞줄 왼쪽에 이집중·윤세주·김규광·최창익 등 10명이 나란히 섰다. 발대식에는 조선의용대 결성에 직접 관여한 정치부 부장 천성(陳誠)과 비서장 허쭝한(賀衷寒)은 물론, 특수공헌을 한 왕판성(王芃生)·아오야마(靑山和夫) 같은 인물들도 당연히 참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치부 부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정치부 제3청 청장 궈마뤄(郭沫若)도 발대식에 참석하여 연설했다고 한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예속되어, 중국항일전쟁의 수요에 따라 활동하였다. 대원들은 국민혁명군 복장으로 차려입고, 왼쪽 앞가슴에 장방형 휘장을 부착하였다. 휘장 가운데에는 한글·한문·영문으로 ‘조선의용대’, 휘장의 왼쪽에는 이름이, 오른쪽에는 직함이 새겨져 있었다.

        

alt

조선의용대 결성 기념사진(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결성을 축하했던 그때 그 장소

조선의용대가 결성된 지 3일 후인 10월 13일 저녁, 한커우(漢口)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조선의용대 결성을 경축하기 위한 오락대회가 개최되었다. 7백여 명의 관중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해방가’, ‘자유의 빛’, ‘아리랑’을 비롯한 노래와 <쇠>, <두만강변> 등의 연극이 공연되었다.

1912년에 결성된 한커우기독교청년회(한커우YMCA)는 1920년대 한커우의 삼교가에 있었다. 후베이성 당안관의 『우한시 교회 개황』에 따르면 한커우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 중 남청년회가 여황피로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1938년 우한시 지도와 우한기독교청년회에서 편찬한 『1911-2011 YMCA 우한기독교청년회 역사 회고』를 보면 1938년 한커우기독교청년회의 위치는 지금의 여황피로와 중산대도 1090호가 교차하는 ‘적승명패세계(廸昇名牌世界)’라는 백화점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즉 ‘적승명패세계’라는 백화점 건물이 당시 조선의용대 창설 선전을 위해 유예대회를 개최한 장소임을 입증해준다. 1938년 10월 14일 『신화일보』에 조선의용대 창설 소식, 김원봉의 연설, 유예대회에서 연출한 내용이 자세히 보도되었다. 조선의용대가 한커우의 YMCA에서 창립식을 가졌다고 해서 현재 한커우의 여황피로 10호에 자리를 잡은 YMCA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기독교청년회 건물은 본래 미국해군청년회가 있던 자리인데, 한커우기독교청년회가 1945년 이후에 그 자리로 옮긴 것이다.       

 

alt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선언문(한민호외 1937년 8월 7일)

           


일행이 여황피로를 찾았을 때는 오후로 막 접어들 때였다. 날은 뜨거웠다. 여황피로는 옛 건물들이 많아 이른바 가두박물관으로도 불린다. 조선의용대 결성 경축 장소를 찾았다는 희열도 잠시, 우리는 이곳에 조선의용대의 ‘기록의 역사’가 없음을 확인하고 시무룩해졌다. 좌표 30.53634N, 114.30341E.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면 ‘시간의 역사’도 온전할 수 없다는 작은 진리를 가슴에 안고 무한 국민정부 청사를 찾아 나섰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