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접시의 추억
봄나물은 삶과 마음을 달래주는
호생초(護生草)

글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봄나물은
삶과 마음을 달래주는
호생초(護生草)
사람 팔자처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 중에는 음식 팔자도 있다. 우리가 즐겨 먹는 대부분의 길거리 음식은 과거에 부자들만 즐겨 먹던 고급 음식이었다. 예컨대 떡볶이도 조선 말기의 조리서 『시의전서』에서 소개하고 있는 ‘떡찜’이라는 궁중 음식에서 비롯됐고 순대와 곱창도 고대에는 상류층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특식이었다. 반면 예전 같으면 보릿고개와 같은 춘궁기에 허기진 배를 달래려 먹었던 것들이 오늘날에는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나물 대신 약초를 캐오리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절기로는 벌써 입춘이 지나 봄으로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연일 영하권의 날씨를 맴돌고 있다. 계속되는 추위에 몸에 힘이 없고 나른해질 땐 제철 봄나물로 식탁 위를 채워보는 건 어떨까. 예로부터 봄에 먹는 냉이·달래·씀바귀는 약초라고 했다.
“산채는 일렀으니 봄나물 캐어 먹세 / 고들빼기 씀바귀며 소루쟁이 물쑥이라 / 달래김치 냉잇국은 비위를 깨치나니 / 본초를 상고하여 약재를 캐오리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지은 『농가월령가』의 한구절이다. 봄나물을 캐러 가면서 한의학서인 『본초강목』을 참고해 나물이 아닌 약재를 캐오겠다고 했다. 겨우내 땅속에 남았다가 언 땅을 뚫고 싹을 틔울 정도의 생명력이니 보약이 아닐 수 없다. 약초를 캐오겠다는 『농가월령가』의 봄나물 노래가 빈말이 아닌 이유다.
봄나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냉이로 끓인 국을 백세(百歲)국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성질을 가지고 있는 냉이가 오장을 이롭게 하여 장수를 누리게 할 만큼 신체에 이롭고 또한 100살이 된 노인도 부담 없이 먹을 만큼 소화도 잘된다는 데서 유래했다.
한편 봄나물은 어려운 시기를 버텨낼 수 있게 한 큰 힘이 되기도 했다. 봄에 양식이 떨어졌을 때 지천으로 널린 나물을 캐다가 죽을 끓여 먹으면 거뜬히 춘궁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에 옛사람들은 봄나물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풀이라 하여 호생초(護生草)라 불렀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아예 그런 나물 종류만 골라 『조선의 구황작물(朝鮮の救荒植物)』이라는 책까지 펴냈다. 한반도에서 수확한 쌀을 절반 가까이 수탈해 가면서 조선 사람들의 굶주림을 염려해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발간 목적이 가소롭기 그지없다.
팍팍한 심신을 달래 줄 곤드레밥
영양이 넘쳐 비만으로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다이어트 식단으로 환영받고 있는 곤드레도 가난한 서민을 굶주림으로 부터 지켜낸 호생초 중 하나다. 강원도 산골 오지마을의 화전민들에게 쌀은 이미 부족하기 그지없었고, 그나마 구할 수 있는 감자·옥수수 등의 양식마저 바닥나면 산나물인 곤드레를 따다 주린 배를 채웠다. 민요인 정선아리랑에 당시의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한치 뒷산의 곤드레 딱죽이 임의 맛만 같다면 / 올 같은 흉년에도 봄 살아나지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가사 속 ‘한치 뒷산’은 강원도 정선군 동면에 있는 산의 지명이고 ‘곤드레 딱죽이’는 산나물의 이름이다. 가사는 거친 산나물이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과 같아서 맛있게만 먹는다면 흉년에도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 현재 우리가 먹는 곤드레밥은 옛날 화전민들이 먹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지금은 쌀밥에 곤드레를 넣어 양념장에 비벼 먹지만 과거에는 곤드레와 콩나물을 잘게 잘라 섞은 뒤죽을 쑤어 먹었다. 지금은 별미로 또 참살이 식품으로 인기가 높지만 예전 산골 사람들에게는 춘궁기를 굶지 않고 버텨낼 수 있게 하는 생명줄이었다.
매일 먹는 반찬들 뒤로하고 오늘 저녁 식탁에는 향긋한 봄나물 요리를 준비해보는 건 어떨까.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곁을 지켜온 모습 그대로 지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윤덕노
음식문화평론가. 1984년 매일경제신문사에 입사해 2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특파원 활동, 출장, 연수 등으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에 머물렀다. 음식에 관심이 많아 관련 자료를 수집해온 결과, 음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주요 저서로는 <음식잡학사전>, <신의 선물 밥>, <붕어빵에도 족보가 있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