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독립운동가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

글 학예실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
독립기념관은 국가보훈처·광복회와 공동으로 김원벽을 2018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김원벽은 두 차례의 학생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학생지도자였다.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3·1운동 참여를 권유받다
김원벽은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1914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에서 수학하였고, 숭실전문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로 진학하였다. 1919년 2월에는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강기덕(康基德)·김형기(金炯璣) 등과 만나 전문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김원벽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박희도로부터 독립선언서 발표 계획을 전해 듣고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2월 25일 정동교회 이필주(李弼柱) 목사의 사무실에 모여, 3월 1일은 중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하고 전문학교 학생 대표들은 제2차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결의하였다.
2월 28일 승동교회에 다시 모인 학생대표들은 이갑성으로부터 전달받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가졌다. 이 자리에서 전문학교 학생들은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에서 제2차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학생대표로 3·1운동을 이끌다
1919년 3월 1일, 김원벽과 학생대표들은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였다. 동시에 제2차 만세운동의 계획을 말하고, 전문학교 학생들은 3월 1일 시위에 가급적 참여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
3월 4일 김원벽은 학생대표들과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 모여,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앞에서 집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튿날 김원벽은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 쓴 깃발을 흔들며 집결지로 나아갔다. 학생들의 만세소리를 듣고 모여든 군중들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숭례문을 거쳐 대한문·종로 보신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김원벽은 일본 경찰들에게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모교인 연희전문학교와 <신생활사>·<시대일보사> 등에서 재직하던 김원벽은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28년 향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정부는 1962년 김원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원벽

연희전문학교 전경(1918년)

김원벽에게 3·1운동 참여를 권유한 박희도(좌)와 이갑성(우, 1920년)

제2차 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한 정동교회

김원벽이 학생대표들과 모여
자주 모임을 가졌던 승동교회

김원벽이 제2차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남대문역 광장

덕수궁 앞 만세운동 장면

김원벽 재판 기록

김원벽 출옥 보도기사